불교는 후한(後漢) 때 중국에 종교로 들어왔다. 중세 위진남북조 시대(221~589)를 거치며 불교 경전 번역이 많이 이루어졌고, 중국 전통문화나 사상과 비교되며 점차 토착화되어갔다. 또 불교 교리 연구나 신앙에서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수(隋)'당(唐)대에 와서는 불교를 중국화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중국불교'를 형성했다.
이에 비해 중국 전통사상인 유교의 경우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불교와 노장사상(도가철학)에 눌려 뒤로 밀려나고, 세력도 위축되어 갔다. 그러자 당나라의 통일 왕조 아래에서는 점차 중국 전통으로서의 유교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 후반기 문장가 한퇴지(韓退之)는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격한 어조의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나라가 멸망하자 계속되지 못했다. 또 송나라의 통일(979) 이전까지 약 70년간 '오대십국'이라는 혼란기가 있었다. 따라서 송나라가 건국 직후 가장 시급하게 생각한 것은 중국 전통사상의 부흥과 새로운 인재 양성이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인재를 '사대부'(士大夫)라고 불렀다. 조선의 '선비'와 같이 엘리트 독서인(지식인)이면서, 관로에 나아가 국가 경영의 책무를 맡는 정치인이었다.
중국 한나라가 인재 양성을 위해 '오경'(五經) 편찬에 힘을 쏟았다면, 송나라 때에는 노장사상과 불교를 물리칠 수 있는 유교 고유의 특징을 찾아 교재로 편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 결과 나온 책이 사서(四書)다. 그러나 논어와 맹자, 대학, 중용은 원전 자체로 문제점이 있고, 내용도 그리 쉽지 않아 유교 경전으로는 완벽한 것이 못 되었다. '대학'이 유교의 이념을 잘 나타낸다고 하지만 철학의 맛이 노장사상이나 불교만 못하고, '중용'은 내용이 어렵고 자료도 통일되지 않았다.
주희(朱熹'보통 '주자'라고 존칭을 씀)는 친구 여조겸과 함께 한천정사에 머물면서 북송 시대(주희는 남송 시대 사람) 선배 학자 4인의 학설을 분류 및 편집하여 '근사록'이라 이름 짓고, 이를 '사서'에 들어가는 입문서로 삼았다.
'근사'(近思)는 '논어'에서 공자가 밝힌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에서 따온 것이다. 학문은 일상생활 속에서 묻고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근사록은 모두 14권이다. 근사록에서 다루는 주자의 선배 학자 4인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다.
책 목차를 보면 도체(道體), 논학(論學), 정사(政事), 교학(敎學) 등 14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유교의 기본 교리인 '수신-제가-치국'의 체계에 맞추어 생활 규범이 정리되어 있지만, 불교와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우주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마치 기독교의 '창세기'처럼 '태극도설'(太極圖說)이 맨 처음에 나온다.
이동희 계명대 윤리학과 교수 dhl333@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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