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 세트/이문열 지음/민음사 펴냄
소설가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 전 12권 세트가 출간됐다. 1986년 집필을 시작해 1998년 제12권 초판을 발표한 이래 16년 만에 전체 세트로 펴낸 것이다.
소설 '변경'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를 배경으로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멍에를 쓴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세 남매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성장을 그려낸 작품이다. 명훈과 영희, 인철의 성장사는 한국사회 성장사의 일면인 동시에, 분단 한국 사회가 가진 깊은 어둠이다.
지은이 이문열은 세 남매의 성장사를 통해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혼란과 무질서, 정신적 방황을 극복하고, 지금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질서와 제도, 정신적 중심이 형성된 시기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가족사를 넘어 한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흔히 우리는 한국 근대사를 정의와 불의, 이념과 사랑, 국가와 개인, 책임과 방종, 선과 악 등으로 쉽게 선을 긋지만, 지은이 이문열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흑과 백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수많은 '개별적 사연'으로 얽혀 이것 혹은 저것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아버지는 6'25때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월북했다. 그는 처자식을 둔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작은 삶'을 버리고 '위대한 삶'을 살고자 했다. 남겨진 처자식은 아버지가 마땅히 짊어졌어야 할 수고를 대신해 모멸과 가난을 떠안았다. 여기에 세 남매는 아버지의 월북으로 '세월의 붉은 딱지'까지 받게 된다.
장남 명훈은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일용직에서 쫓겨나 뒷골목을 전전한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다른 남자(백인 장교)와 결혼해 떠나버린다. 그 후 만난 여자 모니카와의 관계는 육체의 결합일 뿐이다. 건강한 룰(?)이 준수되는 영역에서 제 살길을 찾지 못했기에 명훈은 룰이 없는 주먹 세계에 뛰어들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끝내 정치깡패, 국토건설단, 도시철거민, 광산노역 등을 전전하며 빈민의 전형을 보여준다. 명훈은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질서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전형이다.
딸 영희는 새롭게 펼쳐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화려한 이미지에 도취된다. 물신을 숭배하고 다른 모든 인간적 가치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원리'에 도취한 영희는 매춘부로 전락한다.(영희의 삶은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꺼리지 않는 물신 맹신자들의 삶과 오버랩된다.) 영희는 각고의 노력 끝에 가정을 이루고, 돈에 집중하며, 자본의 노예가 되어 복부인의 세계로 입성해 성공한 삶을 이룩한다. 그러나 그녀의 성공은 그늘지고 상처입은 성공에 다름 아니다.
인철은 지은이 이문열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철이 겪는 방황은 실제로 작가 이문열이 겪은 방황과 비슷하다. 따라서 인철이 고백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이문열의 심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철은 월북해 버린 아버지를 '정액 한 방울'에 비유한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처자식을 버린 남자에 대한 차가운 평가인 셈이다.
명훈은 깡패의 세상에 빠져 살다가 빈민의 삶을 이어가고, 영희는 창녀로 살다가 복부인으로 거듭난다. 이 우울한 이야기는 그러나 우울하게 끝나지 않는다. 한국 근대사가 온갖 부정과 부조리를 거치지만 결국 '밝음'을 지향하듯이, 깡패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명훈은 선량한 시민사회로 복귀를 꿈꾸고, 매춘부의 삶을 살았던 영희는 건전한 주부의 세상을 추구한다.
지은이의 화신인 인철은 작품 속에서 처자식을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세상으로 가버린 '아버지를 정액 한 방울'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문열은 10년쯤 후에 출간한 소설 '시인'에서 시(詩)를 좇느라 처자식을 내팽개친 아버지 김병연(김삿갓)을 원망하던 자식이 끝내는 '아버지의 길'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다. 아버지에게 어찌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삶이 있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묘사는 작가 이문열의 아버지에 대한 심정이 원망에서 납득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설 '변경'은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여러 작품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 12권, 16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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