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나크리 영향으로 한숨 돌렸지만 지난달 하순만 해도 도내 전역이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관련 부서에서 올라오는 보고서에는 평균 저수량이 53%로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물론 틀린 숫자는 아니다. 바싹 말라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가 있는가 하면, 논이 없어져 용도 폐기된 저수지에는 아직도 물이 가득하기에 평균으로 치면 그렇다.
중요한 것은 현장이다. 지난달 30일 영덕을 찾아갔다. 밭은 먼지가 풀풀거릴 정도로 말라있었다. 평균 저수율이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저수지 간에 물을 나눌 수 없기에 당연한 이치다.
밭주인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가뭄은 매년 반복되는데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봐야 되느냐고 했다. 제발 관정 하나만 뚫어 달라고 필자에게 하소연했다. 현장에서 바로 대책회의를 열고 긴급 용수개발비를 내려 보냈다.
필자의 지갑 속에는 쪽지 하나가 들어 있다. 문경을 방문했을 때 어느 농민이 손에 꼭 쥐여준 것이다. '도지사로서 농업만큼은 반드시 지켜 달라, 한'중 FTA가 체결되면 우리 농민들은 다 죽는다'는 내용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 작은 쪽지엔 농민들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며칠 뒤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이 쪽지 내용을 그대로 옮겨 얘기했다. 동시다발적인 FTA 체결로 농촌은 절박한 상황이다, 한중 FTA 협상 때 농축산 분야 주요 민감 품목은 반드시 양허에서 제외하고, FTA 국내대책위원회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소속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격상해서 종합적인 대책을 만들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께서도 공감해 주셨다.
봉화의 산골마을 분천리에서 주민들의 재능나눔으로 '행복마을 가꾸기'를 한다기에 한달음에 달려갔을 때의 일이다. 동네 이장님이 중심이 돼서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 집을 수리하고 있었다. 감격스러운 현장에 필자도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보탰다. 일을 마치고 나서는 동네분들과 둘러서서 얘기를 나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의 추억담에서부터 농사 얘기, 자식 얘기, 이웃 얘기까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부 지원만 바랄 게 아니라 주민 스스로 협력해서 공동체를 만들어 내자는 공감대를 갖게 됐다. 그날만큼 박수를 많이 받아 본 적도 드문 것 같다.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어르신의 감사전화까지 받았다.
오랜 기간 공직에 있는 동안 깨우친 것이 있다. 현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고서는 민생의 고단함을 털끝만큼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고 나서야 옳은 정책이 나올 수 있다.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으로 담아내고, 그렇게 만든 정책이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선순환의 구조가 바로 최일선을 책임지고 있는 자치행정의 요체다.
도지사가 현장에 있을 때 도민들이 안도한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느낀다. 봉화 분천 마을에서처럼 굳이 재정 지원이 아니더라도 좋다. 그저 힘들고 어려운 분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도지사와 감정을 공유하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한다. 필자가 3선 도지사로 취임하자마자 폭염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뛰어다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도지사 책상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 언제나 현장이 답을 준다.
주민을 동원하던 예전과는 달리 도지사가 알아서 찾아가는 파격적인 행보를 요즘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해프닝도 있었다. 가림막 하나 없는 뙤약볕에 서서 한 시간이 넘도록 대화가 이어진다. 애교가 섞여 있긴 하지만 항의도 많이 받는다. 형식도, 격식도 따지지 않은 때문이다.
6선 자치단체장이 되기까지 민선 자치 20년의 현장을 지켜왔다. 주민과 함께 울고, 웃고, 뒹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언제나 두렵다. 현장의 목소리는 변화무쌍하고 엄중하며 정확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경북 사람들은 똑똑하고 현명하다. 아직도 필자가 가야 할 현장은 너무 많다. 편한 신발을 몇 켤레 더 장만해야겠다.
김관용/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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