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모슬포에서 국밥을

간밤에 구름 사이로 달이 잠시 이마를 내보였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마전선 탓에 온종일 흐리다가 구름 커튼을 젖히고 얼굴을 보여 준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다. 공중에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달은 구름 물결을 타고 쏜살같이 흘러간다. '문 리버'(Moon river), 그래 이런 걸 두고 문 리버라고 하나 보다. 나는 혼자서 앤디 윌리엄스가 부른 문 리버를 계속 흥얼거려 본다.

숙소인 한림에서 어정거리며 아침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모슬포 쪽으로 나가 마음 내키는 곳에서 아무거나 먹기로 했다. 달포 전 제주에 왔을 땐 이곳 모슬포 읍내 부두식당에서 자리돔 물회와 구이를 먹었기 때문에 이번엔 좀 색다른 음식이 먹고 싶었다. 동행 중의 한 친구가 "모슬포 오일장의 순대국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별다른 대안이 없어 "그러면 그러자"고 했다.

'모슬포에서 국밥을' 먹자는 제의가 튀어나오자마자 '문 리버'가 주제가였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란 영화가 섬광처럼 떠올랐다. 오늘 이러자고 엊저녁부터 문 리버란 노래를 저녁 내내 중얼거렸나 보다. 영화의 첫 장면이 리와인드 키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자동으로 재생되어 신나게 돌아간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오드리 햅번이 테이크 아웃 커피와 베이글 빵을 손에 들고 티파니란 보석가게 앞에서 아이 쇼핑을 하는 광경은 기가 막히는 명장면이다. 오죽했으면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멋쟁이들이 햅번이 입었던 검은 옷을 입고 티파니 앞을 서성거리며 그녀의 흉내를 냈을까. 오늘 나의 '모슬포에서 국밥을'이란 이벤트가 70여 년 전 뉴욕 거리에서 있었던 '티파니에서 아침을' 재현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밥은 매력 있는 음식이다. 국에 밥을 만 간편 음식이지만 먹고 나면 배가 부르다. 미국의 햄버거와 콜라가 국밥에 필적할 만한 먹거리지만 멋과 맛은 코리아의 국밥을 따라오지 못한다. 국밥의 종류는 다양하다.

지역별로 이름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소고기국밥, 육개장, 소머리국밥, 소내장국밥, 따로국밥, 돼지국밥, 순대국밥, 콩나물국밥, 북어국밥, 굴국밥 등 많기도 하다. 국밥집은 시장통이 제격이지만 이웃 동네로 갈라지는 삼거리 모퉁이도 좋은 자리로 친다. 옛날부터 국밥집 주변은 온갖 이야기가 넘쳐나는 스토리텔링의 본산지다.

제법 행세깨나 하는 촌로들은 장날이 오면 엉덩이가 들썩거려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한다. 며느리가 건사해준 모시옷에 두루마기까지 걸치고 시장으로 나간다. 누구와 만날 약속은 없지만 나서기만 하면 같은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수인사를 건네고 농사 안부를 묻고 나면 자연히 발걸음은 국밥집으로 향하게 된다. 요기가 목적이 아니라 컬컬해진 목을 축이는 데는 한 잔 막걸리보다 나은 게 없다.

국밥 한 그릇을 안주로 술 한 되를 시키면 너도나도 번갈아 가며 '한 되 더' 하고 앙코르를 청하게 된다. 늦게 온 친구가 합석하게 되면 또 술이 들어오고 서너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빈속에 탁주를 들이붓게 되면 취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어느새 해 질 녘,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집에 당도하면 며느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버님, 두루마기는 우쨌어예" 하고 묻는다. "야야, 초장에 휘딱했는갑다."

어느 하루는 시장 복판 국밥집 앞에서 설 사돈을 만났다. "사돈어른, 대포를 한 잔 하실랍니껴, 밥을 잡수실랍니껴."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둘 중 하나만 찍으라고 했다. 사돈 왈 "막걸리 안주에는 국밥도 괜찮지요". 사돈은 두 가지를 모두 먹겠다고 어깃장을 부렸다. 딸의 시아버지 앞에선 괜히 주눅이 들어 외상을 달아 놓고 술밥 간에 그날의 비용은 몽땅 누울 사돈이 내는 것이 시골 풍습이다.

"남면 삼거리 식당/ 산 타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급급한 나/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처럼 허룽대며 먹은 국밥/ 뒷맛이 혀 돌기마다 싸하게 감친다/(중략) 작은 식당 손님 많지 않지만 늘 즐거운 그녀/ 내일이라는 희망을 후루룩 돼지국밥에 얹어준다/ 식탁 어섯 흘레붙는 파리 한 쌍마저 곱기만 하다."(최범영 시인의 '돼지국밥' 중에서)

우리는 이날 모슬포시장 안 소영이네(송순미'010-7432-1788) 가게에서 국밥을 먹었다. 사돈어른을 만나지 않았는데도 5천원짜리 순대국밥을 한라산 생막걸리에 곁들여 배불리 먹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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