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일영 대법관)는 14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교사 A씨가 남편인 B씨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에서 "A씨가 미래에 받을 퇴직급여도 재산분할 대상이 된다"고 판결했다. 장래에 받을 퇴직금과 퇴직연금을 확정할 수 없어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던 기존 판례를 바꾼 것이다.
대법원은 "이혼소송 사실심 변론종결 시를 기준으로 경제적 가치를 현실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퇴직금채권은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해야 하고, 퇴직연금은 일정 비율로 상대 배우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사회적 중요성을 고려해 공개변론과 생중계방송까지 동원해 심리를 진행했던 이 판결은 19년 만에 종래 입장을 뒤집으며 적잖은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다. 이 판결에서 B씨 측 변론을 맡은 양정숙(49) 변호사를 만났다.
-어떻게 이 소송을 맡게 됐나?
▶이혼소송에서 여성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다. 그게 두려워 개인이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기여한 만큼, 또 경제활동 능력이 사장되고 쇠퇴한 데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퇴직금이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는 게 평소 신념이었고 비슷한 주제로 하는 발표도 자주 했다. 어느 날 대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국선 변호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법률구조결정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을 변론하게 됐다.
-판결대로라면 퇴직금이 지금까지 재산분할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왜 이런 판결이 나오지 않았나.
▶재산분할은 나눠야 할 재산이 현존할 것을 전제로 한다. 없는 재산을 나눌 순 없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장래 퇴직금은 이혼소송 사실심 변론종결 시엔 존재하지 않는다. 또 회사가 도산하거나 파산할 때도 있고, 뇌물죄 등 범죄에 연루되면 못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법원은 퇴직금 등을 그동안 불확정 채권으로 봤다. 퇴직금청구권의 불확정성 때문에 재산분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퇴직급여를 예상액만큼 못 받을 때가 걸림돌이었다. 실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작다. 1% 정도밖에 안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사건 대부분을 재산분할 대상에서 제외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것을 대법원에서 인정해준 것 같다.
-판결 이후 반응은?
▶대법원 공개변론을 끝내고 나서 있었던 일이다. 시댁 가족들과 판결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남편이 시누이와 시부모님께 "내가 만약 이혼을 한다면 내 퇴직금을 나눠줘야 할까?"라고 묻자 시어머니께서 "주면 안 되지. 네가 번 돈이잖니?"라고 했다. 제가 다시 "만약 언니(시누이)들이 이혼을 한다면 고모부 퇴직금을 받아야 할까요?"라고 물었더니 "그건 받아야지"라고 하셨다.(웃음)
판결에 대해 대체로 남성은 불리하다고 하고 여성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혼소송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은 현재 진행 중인 이혼소송에서 퇴직금을 주장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막상 판결을 받아놓고 보니 다른 사건에서는 불리한 입장이 됐다. 사학연금을 받는 한 의뢰인은 이 판결이 나오자 이혼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했다. 거액을 나눠주려니 상실감이 큰 모양이었다. 앞으로 퇴직금을 (많이) 받는 쪽은 이혼을 피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퇴직금 청구권이 발생하는 시기는 이혼소송 사실심 변론종결 시다. 그런데 지급의무자가 퇴직금을 못 받거나, 예상보다 적게 받게 되면 어떻게 되나. 또 퇴직을 해야 생기는 돈인데,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을 땐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렇다. 연금수급권자(퇴직금 지급을 해야 하는 쪽)에게 불리하다. 퇴직 시 그 금액을 못 받거나 덜 받게 되면 소송 당시 지급했던 퇴직금 일부에 대해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본인의 불법행위로 퇴직금을 못 받게 되면 부당이득반환청구가 인용될 가능성이 작다.
반대 측은 "받을 거라곤 퇴직금청구권뿐이고 아무 재산도 없는 경우엔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이 부분이 관건이었다. 장래에 더 많은 액수를 받을 수 있더라도 분할 시점(이혼소송 사실심 변론종결 시)에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상대방에게 지급해야 한다.
-퇴직금'퇴직연금은 두 사람이 원만한 혼인 관계를 유지할 때 대비하는 노후 계획일 수 있다.
▶반대 측은 퇴직금은 노후생활 수단이기도 한데 이것마저 분할 대상에 포함하면 재혼도 어려워져서 재혼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하지만, 퇴직금은 한 사람만의 노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배우자를 포함한 가족 전체의 노후보장 수단이다.
-결국, 재산분할 문제가 이혼에 변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판결로 이혼의 자유를 침해받는 쪽이 바뀔 것 같은데.
▶그렇다. 여태까지는 퇴직 전에 이혼하면 퇴직금을 받을 수 없어서 퇴직할 때까지 이혼을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혼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제는 퇴직금을 줘야 하는 쪽이 이혼을 미룰 수도 있다. 재산이 없는데 빚을 내서 줘야 한다면 또 권리 침해가 있을 수 있다. 상당한 경제적 불편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공무원'교직원 등 퇴직금 수령 여부와 액수가 확정적이고 안정적일수록 이혼 상대방에 유리하게 되는 건가?
▶퇴직 후 노후 안정 여부가 이혼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배우자가 사업'자영업에 종사하는 경우 이혼하면 노후에 (퇴직금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 그물망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공무원'교사 등을 배우자로 둔 여성이 20년 정도 혼인을 유지하면서 육아'가사 등을 하면 공동의 노력으로 인정되고, 퇴직금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해 주장할 수 있다.
-황혼이혼보다 재혼할 가능성이 크면서도 퇴직금 수령이 기대되는 40, 50대 전업주부에게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중년이혼이 늘어나지 않을까?
▶45~50세 전업주부 여성이 이혼한다면 '이익'이 가장 클 것이다. 상대 배우자의 직장 근속연수를 고려하면 퇴직금 액수가 상당할 것이다. 튼튼한 노후대책이 될 것이고, 이 경우 판결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고서) 이혼도 사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중년) 이혼이 증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다른 재산처럼 퇴직금도 분할 시기'방식'비율이 법관의 재량에 달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입법으로 해결할 수 없나?
▶그게 큰 문제다. 엄격한 증명과 소송절차에 의해 증명되는 다른 재판과 달리 재산분할은 비송사건이다. 판사의 재량 여지가 많다는 뜻이다. 재판 당사자는 판사가 퇴직금을 기타 사정으로 얼마나 참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 수학 공식처럼 정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퇴직금도 재산분할산정 공식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재산분할 자체가 법원의 판단에 좌우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다.
-장래에 수익이 발생할 것이 확실히 예상되고, 기여가 인정되면 퇴직금'퇴직연금이 아니더라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될 수 있나?
▶예를 들면, 어떤 여성이 남편을 열심히 내조해 의사가 되거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초기엔 수입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크게 늘 것이다. 이런 경우, 즉 무형의 기술'전문자격 면허'스톡옵션'비상장주식 등도 재산분할청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있다. 법조계 내부에서도 쟁점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판결을 받아보고 싶다.
◆퇴직금 어떻게 청구하나?
이번 판결로 '장래에 받을 퇴직금'퇴직연금이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된다'는 대전제가 생겨났으며 분할 대상에 포함된 퇴직금 등은 재산분할의 일반 원리의 적용을 받게 된다.
재산 분할 제도는 혼인 기간에 부부가 공동으로 노력해 형성한 재산을 기여도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 이 때문에 일방의 명의로 된 재산이라도 취득한 경위를 따지게 된다. 퇴직금'연금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된다고 한 이번 판례도 같은 맥락이다. 분할 여부나 비율을 따질 때 기여도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양 변호사는 "퇴직금 등이 분할 대상 재산에 포함되더라도 별거 중 형성된 재산이나 이혼 후 증식된 재산에 대해선 분할청구를 할 수 없다"며 "재산분할청구권은 단순히 같이 살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경제활동에 대한 기회비용으로 인정받을 정도의 육아'가사 노동이 있어야 기여도가 인정된다"고 했다.
재산분할청구권의 소멸시효는 2년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의 소급효는 현재 이혼소송 중인 재판 당사자뿐만 아니라 재산분할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2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에까지 미친다. 양 변호사는 "이미 재산분할 판결을 받았더라도 이혼 후 2년이 지나지 않으면 소송으로 다시 받을 수 있다. 이번 판결이 사정변경에 해당하기 때문에 분할 대상에서 빠진 부분(퇴직금 등)에 대해선 별도 소송이 가능하고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양 변호사는 서울 혜원여고,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가족법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대한변호사협회 감사, 여성변호사협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다. 다음 달 15일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장윤석(영주)'이한성(문경예천) 국회의원과 특허소송관할대리권에 대한 세미나를 공동주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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