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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대구에서 짧은 삶 마친 독립운동가 김한종

"우리 4천 년 종사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섬 오랑캐(島夷:일본)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은 일가월증(日加月增)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以)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예축(豫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기 바란다. 만일 본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할 때는 자체 정규(定規)가 있어 이에 따라 징계할 것이다."

1915년 대구서 조직된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은 1917년 군자금 마련 때문에 잡혀 옥고를 치른 뒤 자신을 찾아온 김한종(金漢鍾'1883~1921)을 만나 의기투합했다. 충청지역에서 의병 소모장(召募將) 등 항일 국권회복 운동을 벌이며 조선총독을 처단하려던 계획을 세웠다 실패하고 피신 중이던 김한종은 대한광복회 포고문 취지에 공감, 광복회 가입과 함께 광복회 충청도지부장을 맡았다. 군자금 모집활동이 어렵자 보다 강력한 활동을 벌이며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키로 하고 천안읍내 악덕 지주를 응징토록 했다. 1918년 1월 지주처단으로 조직이 드러나 동지들과 잡혀 1919년 사형이 확정됐다. 이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 1921년 오늘 고향을 떠나 대구형무소에서 박상진과 함께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07년 충남 예산군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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