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5만 원권 고민

5만 원권이 처음 나온 것은 2009년 6월이었다. 1만 원권이 최고이던 액면을 5배까지 늘리기까지는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고액권 발행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범죄'불법 자금으로 악용되는 것이 걱정이었다. 찬성하는 쪽에서는 고액권이 반드시 범죄와 탈세를 키우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곤혹스러운 것은 검찰이었다. '사과 상자'로 전달되던 거액 뇌물의 부피가 줄면 뇌물 사건 수사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은 자명했다. 5만 원권이 세상에 나온 지 5년여, 검찰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조현룡 새누리당 의원이 서울 강남의 고급 식당과 호텔 커피숍에서 철도 부품 업체로부터 받은 것으로 검찰에서 조사된 1억 6천만 원은 모두 5만 원권이었다. 같은 당 박상은 의원의 차량에서 발견된 3천만 원도 모두 100장 단위 띠지로 묶인 5만 원권 6다발이었다.

1만 원권이 최고액권이던 시절 1억 원 이상 거액 뇌물의 대명사는 사과 상자였다. 1997년 수서 비리 사건을 저지른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정관계 로비를 위해 사용한 것이 바로 사과 상자다.

5만 원권 발행 후 양상이 달라졌다. 요즘은 빈 양주 상자나 케이크 상자만 있어도 1억쯤은 쉽게 전할 수 있다. 뇌물 상자의 부피가 5분의 1로 줄었으니 은닉도 쉬워졌다.

시중에서 5만 원권이 찍어내는 족족 사라지고 있다. 찍고 또 찍어도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2009년 5만 원권이 처음 발행된 후 환수율은 2012년 61.7%까지 상승했다 지난해 48.6%로 가파르게 하락하더니 올 상반기에는 28.1%까지 뚝 떨어졌다. 환수율이 28%라는 것은 100장을 찍어도 유통되는 것은 28장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도피를 도운 소위 '김엄마'의 친척집에선 5만 원권 15억 원이 발견됐다. 앞서 발견된 현금 상자를 포함하면 유 전 회장의 도피 자금은 당초 알려졌던 20억 원을 훌쩍 넘긴다. 5만 원권이 다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 그런 곳에 숨어 있었다. 부자들 역시 5만 원권 쟁이기에 나서고 있다. 재산세 상속세 증여세 물어가며 재산을 노출시키기보다는 그냥 현금으로 가지고 쓰고 물려 주는 것이 낫다는 심리가 확산된 탓이다.

5만 원권이 이런 식으로 사용, 은닉되는 것은 국가 경제를 좀먹는다. 이제 정부와 중앙은행이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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