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하다는 표현이 적확했다. 대구를 찾은 스콧 와이트먼(53) 주한 영국대사는 호텔로 향하지 않았다. 그가 머무른 장소가 그의 소탈한 성품을 대변했다. 그가 하룻밤 묵어간 곳은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북한이탈주민을 돕는 비영리단체인 '더나은세상을위한공감' (이하 공감)이 낡은 한옥을 고쳐 지난달 진골목에 문을 연 곳이다. 이달 6일 오전 8시 30분, 이곳에서 와이트먼 대사를 만났다. 인터뷰는 한옥 마루에 마주 앉아 아침 바람을 맞으며 진행했다.
◆ 대구 한옥 찾은 소탈한 대사님
한옥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자 와이트먼 대사와 일행 2명이 마루에 양반 다리로 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자세는 한국식인데 메뉴는 서양식이다. 구운 토스트와 커피, 포도와 요구르트가 전부다. 기자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들이닥치는 바람에 식사를 채 끝내지 못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와이트먼 대사는 인터뷰 전날인 5일 대구시와 경상북도 등 지방 정부 방문차 대구를 찾았다. 지난해 세계에너지총회 때 대구를 찾았었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서울과 수도권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도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왜 호텔이 아니라 한옥 게스트하우스였을까. 공용 화장실 하나가 전부인 한옥이 불편할 법도 한데 "(화장실을) 차례대로 썼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며 털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소 북한이탈주민에 관심이 많았고 대구에 온 김에 공감을 찾기로 했어요. 그런데 공감에서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고 하기에 진짜 한옥에서 잘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여기서 묵기로 했어요. 게다가 호텔에 가는 것보다 가격도 싸고요. 하하."
그는 바쁜 일정을 쪼개 공감을 찾았고, 대구에 사는 북한이탈주민들과 비공개로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이 같은 관심을 반영하듯 주한 영국대사관은 2011년부터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영어프로그램'English for the Future'를 운영 중이다. 이는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에 정착할 때 영어 능력이 부족해 학업과 취업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에 주목하고 영국대사관이 영어 교육 및 영국 유학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혜택을 봤고, 이 중 선발된 일부 학생들은 5~6주 과정으로 영국에서 집중 영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영국 외무성 장학 프로그램은 매년 북한이탈주민 한 명을 뽑아 영국 현지에서 석사 학위 과정을 공부할 기회까지 제공하고 있다.
와이트먼 대사는 "국제 사회와 영국은 북한의 인권 문제를 꾸준히 주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한국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들"이라며 "이들은 앞으로 통일 한국에서 아주 중요할 역할을 할 사람들이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자질을 갖춰야 한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중요한 기관에서 일하려면 영어 실력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영국대사관에서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 영국 대학들, 지역 대학과 교류 물꼬 터
그가 이번에 대구를 찾은 또 다른 이유는 경북대 방문이다. 경북대와 영국 노섬브리아대는 MOU를 맺어 공동 학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공동 학위 프로그램에 참가한 노섬브리아대 학생 6명이 올해 경북대 졸업장을 받았고, 추가로 12명이 경북대에 공부하러 올 것"이라며 "양국의 젊은이들이 서로 낯선 문화를 이해하고, 함께 공부하는 것은 영국과 한국의 미래 관계를 생각했을 때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에든버러대와 글라스고대도 경북대와 교환학생 프로그램 협약을 맺었다.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에든버러대의 교사 교육 시스템은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다. 와이트먼 대사는 "에든버러대는 교사 교육에 초점을 맞춰 경북대와 교류를 진행할 것"이라며 "한국 학생들은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영국 교사들도 이 과목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가르칠 수 있을지 한국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나라 대학과 영국 대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균형 발전'이다. 교육부는 지난달 29일 서울'수도권 대학과 지방 대학의 균형을 맞추고자 '지방 대학 및 지역균형 인재 육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이하 지방 대학 육성법)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법을 제정해 지역 인재의 지역 대학 입학을 유도해야 할 만큼 서울과 비수도권 대학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그는 "영국은 한국과 상황이 다르다. 많은 영국 대학들은 아주 길고, 깊은 역사를 갖고 있으며 런던과 다른 지역 대학들이 좋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가 런던에 있는 게 아니다"며 "지역 대학이 지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대학 간의 균형 발전 문제도 앞으로 한국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 한국어 공부하고, 아파트 생활하고
교육과 경제, 북한 문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중국어와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와이트먼 대사는 런던에 있을 때 영국 외무성 외국어센터에서 약 1년간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에 온 뒤 3주간 '집중 교육'도 받았다. 지금도 짬을 내 2주에 한 번씩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는 "한국어는 진짜 어렵다"고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어와 영어는 문법이 완전히 달라 유럽인으로서 어려움을 느꼈어요. 하지만 한글은 진짜 환상적(Fantastic)입니다."
와이트먼 대사는 한국의 아파트 생활도 체험했다. 그가 살았던 곳은 서울의 평범한 아파트 12층이었다. 대사관 관저를 마다하고 한국인 가족과 함께 했던 3주간의 아파트 생활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경험이다. 그가 갑자기 서울의 버스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만큼은 저도 평범한 서울 사람이었지요. 아침마다 버스로 출근했는데 서울 구석구석을 잇는 효율적인 버스 시스템에 완전 감동받았습니다. 지하철도 잘 돼 있고요.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울 버스는 최고라고 극찬했습니다. 하하."
와이트먼 대사는 전날 밤 대구 골목을 걸었다. 한옥 게스트하우스 맞은 편에는 20년 넘게 진골목을 지켜온 '미도다방'과 닭백숙집, 청국장집 등 평범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대구의 살갗을 느끼기 좋은 곳이다. 아파트에서 느낄 수 없었던 한옥의 매력과 아기자기한 대구 골목의 멋을 느꼈을 터다. 인터뷰가 끝난 뒤 와이트먼 대사가 마룻바닥에서 일어났다. 한국식으로 좌식 인터뷰를 감행한 것이 뒤늦게 미안해졌다. 그는 "아직도 양반 다리가 익숙하지 않다"며 껄껄 웃어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탈한 사람이었다.
※스콧 와이트먼(Scott Wightman) 대사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으로 에든버러대에서 프랑스어와 유럽제도학을 공부했다. 1986년 베이징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상무부를 담당했으며, 1994년부터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2002년 로마 주재 영국대사관 부대사, 2008년부터 2010년 11월까지 영국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을 역임했다. 이탈리아와 중국어에 능통하며, 1년간 한국어도 공부했다. 2011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주한 영국 대사로 근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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