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낮엔 휴식처로, 밤엔 연지곤지…경주의 숨은 관광지

"경주? 수학여행 때 빼놓고 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 머릿속에는 '경주=수학여행'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들은 경주를 '고리타분한 유적지'로만 기억하기도 한다. 항상 사람들이 많은 곳은 천마총 입구 쪽의 대릉원, 국립경주박물관, 불국사, 석굴암 등등이다. 역사나 유적지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차를 내달려 감포에서 회를 즐기거나 보문단지의 놀이공원, 워터파크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지난 6월 12일 개봉한 영화 '경주'는 이런 선입견에서 조금 벗어난 시각으로 경주를 담은 영화다. 영화 '경주'의 장률 감독은 145분이라는 긴 상영시간 속에 '경주'라는 도시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경주가 유적지 가득한 엄숙한 곳이라기보다는 유적지와 어우러진 삶을 사는 곳임을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영화 '경주'는 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베이징대학 교수 최현(박해일)의 여정을 쫓는다. 상갓집에 들른 뒤 그는 문득 고인이 된 형과 함께 7년 전 들렀던 경주의 찻집에서 춘화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무작정 경주행 열차에 올라 그 찻집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춘화와 여주인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찻집을 인수했다는 미모의 여인 공윤희(신민아)가 있다. 최현과 공윤희,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 '경주'는 노서동'노동동 고분군과 봉황로 인근에서 주로 촬영됐다. 천마총이 있는 대릉원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찾기도 쉽다. 하지만 대릉원만 보고 지나간 여행객들은 노서동'노동동 고분군 뒤편이 경주 시내중심가라는 사실을 놓치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장률 감독은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995년에 경주를 처음 와 봤는데, 능과 일상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너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영화 내내 죽은 사람과의 추억을 붙들고 있는 두 주인공의 처지가 왕릉 옆에 시가지를 두고 있는 경주의 모습과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은 대릉원과 달리 담장이 없다. 원래는 고분군 주변으로 민가들이 꽤 많았었는데 여행지로 재정비하면서 일부 민가를 철거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시민들에게 친숙해서인지 이곳은 여행객뿐만 아니라 산책하러 나온 시민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 고분군 중 가장 큰 고분인 봉황대는 아름드리나무가 고분 위에 꽂아놓은 듯 자라고 있다. 영화에서는 최현과 공윤희가 고분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영화에서처럼 근처 경비원에게 크게 혼쭐이 날 수도 있다.

◆차(茶)가 어울리는 경주

영화의 배경이 되는 찻집 '아리솔'은 실제로 경주에 있는 찻집이다.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에서 홍살문이 있는 일방통행 도로를 찾아 들어가다 보면 공영주차장 맞은편에 찻집 '아리솔'이 있다. 찻집 입구는 옆에 난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가면 나온다. 찻집 정원의 모습은 영화에서 보던 그대로이다. 다만 움푹 파인 돌 안에 있던 금붕어는 이제 없고 영화보다 수풀이 조금 더 우거져 있다.

극 중 최현이 차를 마셨던 곳은 실내에 들어선 뒤 복도를 따라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방이다. 아리솔에는 최현이 마셨던 황차 이외에도 다양한 차를 맛볼 수 있는데 6천~8천원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영화에 나왔던 춘화는 동국대 미술학부 김호연 교수의 작품이다. 아리솔에서는 이 작품을 볼 수 없다. 그 대신 아리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능포다원'에서 영화에 나왔던 춘화와 비슷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능포다원은 김호연 교수의 부인 이일순(50) 씨가 운영하는 찻집이다. 이 씨는 "장률 감독의 부탁으로 영화에 잠깐 출연할 뻔했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씨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는데, 이 씨는 "분량이 너무 길어 편집돼버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능포다원에서 맛본 차는 이 씨가 직접 만들었다는 홍삼황차다. 녹차를 발효시켜 만든 황차에 홍삼 향과 성분을 넣어 만든 차인데 품이 많이 가는 탓에 많이 만들어내지는 못한단다. 차와 곁들여 나온 김부각도 견과류가 붙어 있어 짭짤하면서 고소하다. 이 씨는 "단지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찻집의 모습이 좋아서 연중무휴로 찻집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밤이 되면 또 다른 경주가…

지금처럼 오후 7시쯤 돼야 해가 지기 시작하는 여름철이라면 근처에서 조금 일찍 저녁을 먹은 뒤 근처 카페로 향해도 좋다. 노서동'노동동 고분군 주변에는 고분 방향으로 큰 창문이 있는 카페들이 많다. 그곳에서 해가 질 때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창 밖을 바라보면 왠지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고분 능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밤이 더 깊어지면 고분 주변으로 경관조명이 켜지면서 고분군은 색다른 화장을 한다. 장률 감독이 말했던 '삶과 죽음의 공존이 어색하지 않은 경주'의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는 시간대다. 경관조명을 밝힌 고분군 뒤편으로 상가들이 밝히는 간판 불빛과 가로등 불빛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근사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치 로마나 파리처럼 유적지와 시가지가 공존하는 유럽의 어느 도시 풍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날씨가 좋고 선선하다면 벤치에 앉아 근처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사온 캔맥주를 마시며 고분과 상가의 불빛을 감상해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고분 옆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은 여행객들에게는 '청춘 게스트하우스'가 답이 될 것이다. 이곳은 영화 '경주'에서 공윤희의 집으로 나왔던 곳이다. 특히 "2층에 묵으면 고분의 야경이 더 잘 보인다"는 투숙객들의 평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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