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 몇 명과 동해안을 찾았다. 이른 아침,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커피 타임을 가졌다. 아득히 멀리 수평선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구름을 이고 있는 산들이 근위병처럼 팔을 벌려 떠오르는 해를 맞이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묵은지 같은 친구들이니 서로 이력을 익히 아는 사이가 아닌가. 일 이야기, 가족 이야기, 나이 먹는 이야기 등 수다스러웠다.
문득 한 친구가 '첫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 초등학교 시절의 이야기 도중 나온 말이 아니었을까. 설익고 풋풋한 첫사랑들이 다투어 등장했다. 아침 햇살처럼 빛났으나 수평선처럼 멀어져간 순간들이었다.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센스 있는 한 친구가 CD를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카페 여주인이 자신의 연주를 직접 녹음한 것이라 했다.
우리는 일제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왠지 좀 애타고 슬펐다. 그립고, 안타까웠다. 한 친구가 넌지시 제안했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집에 가는 길에 들러보는 게 어때?"
승용차 두 대가 몇 번이나 부근을 오르내렸지만 문제의 카페는 눈에 띄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넘겼다. 드디어 앞차에서 포기하자는 사인이 왔다. 우리 중 가장 깨우침이 빠른 친구였다.
"점심이나 먹자. 저기 저 물곰탕 집이 좋겠네."
바로 그때였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이 우리들 눈에 들어왔다. 하나 그것은 환상 속의 아름다운 카페가 아니라 허름한 민박집이 아닌가. 이럴 수가! 어쩌면 우리는 로코코 양식의 멋진 카페를 기대했던 지도 몰랐다. 면식도 없는 카페 여주인이 자신의 음악 세계에 우리들의 첫사랑을 초대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은 아닐까.
첫사랑은 그저 가슴 깊숙한 오지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굳어버린 화석인지도 모른다. 삶이 외롭거나 혹은 황량할 때 환희를 느끼게 하는 무지개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인간의 심혼 은밀한 곳에 맑은 샘으로 고여 있다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급한 물살을 이루며 흐르는 강물일는지도.
누군가의 가방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몇 시에 집에 오느냐는 가족의 전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소리다. 점심은 먹었느냐, 재미있느냐, 분주하다.
박기옥 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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