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사랑은 아름다워라

'시간은 아름답다'는 생각을 몽골의 초원에서 처음으로 해 보았다. 몽골의 낮 시간은 밤 시간보다 훨씬 길다. 밝음은 어둠보다 화려하다. 밤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둠이 화려해지려면 빛이 가미되어야 찬란해지는 법이다.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이 원리를 따르고 있다.

몽골의 초원을 온종일 달리면 눈에 보이는 건 푸른 풀밭뿐이다. 하늘에 해가 떠있는 낮 기간 동안 생각으로 매달릴 수 있는 명제는 '시간'밖에 없다. '시간은 실존하고 있는가.' '시간이 존재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굴러가고 있는가.' '시간은 왜 정지하지 않는가.'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데 현상과 사건들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면벽 가부좌한 선승이 풀리지 않는 화두에 매달리듯 광활한 풀밭 선방에서 '시간'에 달라붙어 해답을 구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쭙잖게 얻은 결론은 '시간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시간은 흘러가는가. 우주는 가로세로 높이에서 결정되는 공간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다고 한다. 시간이 순류(順流)를 버리고 과거로 흘러가는 역류현상을 보여 줄 수는 없는가. 그럴 가망이 전혀 없다면 시간은 멋도 없고 풍류도 없는 맹물이다.

밭 갈던 소가 다른 이랑으로 한 발을 내딛고 땡땡이를 부릴 때 멋이 창출되는 법이거늘 시간은 어찌하여 사춘기도 없이 멋 한 번 부려보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달리기만 하고 있는가. 하기야 시간의 궤도 이탈을 부추기는 것은 정숙한 숙녀에게 바람나기를 충동질하는 심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시간과 시각은 어떻게 다른가. 1차원 직선상의 제로 차원의 점 즉 시간의 어느 한 시점이 시각이다. 시각과 시각 사이의 구간이 바로 시간이다. 시각은 정지된 상태이며 시간은 움직이는 상태이다. 그런데 '시간은 돈'이란 말처럼 시간과 돈은 등가교환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가치로 환산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란 그릇 속에 우리의 삶을 채워 넣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이 흘러가 버리고 만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가. 있다. 숱하게 많은 직업소개소와 인력시장 등 고용 자체가 시간을 사고파는 매매시장이다. 노동력은 있되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시간을 팔기 위해 새벽 일터로 나선다. 가난한 이들은 시간을 판 대금으로 쌀과 반찬을 사서 목숨을 이어 나간다. 그들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 달력에 1월은 20일로, 2월은 14일로 줄어들지만 눈치 채지 못한다. 부자의 달력에는 3월은 40일, 4월은 44일로 채워지지만 그들 또한 시간을 샀던 일을 기억하진 못한다. 시간의 장난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에메가 쓴 '생존시간 카드'란 단편소설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은 시간을 거래하는 얘기로 끝이 나지만 요즘은 한 술 더 뜬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삼성과 애플은 비싼 값으로 기계를 팔아먹고 소중한 시간까지 공짜로 빼앗아간다. 손가락 끝으로 황금을 날리는 청춘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이번 몽골 여행에서 소중한 경험을 했다. 돈을 주고 산 초원의 시간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나의 달력에 7월은 31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풀밭에서의 감동은 7월 65일쯤으로 늘어난 듯하다.

몽골에 가보기 전부터 그곳을 동경해 왔다. 유목민들이 양과 염소를 기르면서 이곳저곳 초지를 옮겨 다니며 짓고 부수기를 거듭하는 게르에 자보고 싶었다. 몽골 병이 깊어지자 게르 한 채를 구입하여 나의 공간으로 만들 생각도 해보았다. 상상은 하늘 높이 날아가 끝 간 데 없이 치달았다.

어느 하루는 게르의 벽을 펠트(felt'양털)로 덮고 주거 공간 중앙에 멋지게 어울리는 난로까지 설치하기도 했다. 더러 친구들이 찾아오면 몽골에서 흔한 양 대신에 모이를 쪼고 있는 닭을 잡아 화덕에 얹어 구워 먹을 계획까지 세워 보았다. 게르 밖 응달에 묻어둔 암팡지게 생긴 술독에서 잘 익은 막걸리를 퍼와 취할 때까지 마시며 '그대 있음에' 감사를 드릴 생각이었다.

유목민들이 즐겨 연주하는 모린 후르(Morin huur)와 무기를 놓아두는 호이모르(Khoimor)라는 북쪽 공간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스피커까지 올려놓을 작정이다. 이 소리통에선 벨기에 출신 케옵스(Kheops) 그룹이 부르는 초원의 슬픔과 외로움을 대변하는 듯한 '집시의 힘'(Gipsy power)과 같은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온종일 울려 나왔으면.

이번 여행의 숙소인 게르에는 TV도 시계도 없었다. 그렇지만 초원의 시간은 항상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시간은 아름다워라. 시간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은 더 아름다워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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