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공원은 이름처럼 대구 역사의 상징적 장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민족사나 교회사에 있어서 치욕스러운 장소였다. 일제는 1916년 대규모의 대구신사를 조성해 점차 확대했다. 신사는 일본의 천조대신을 위시한 여러 신들을 안치한 곳이다. 당시 돌다리를 건너 몇 계단을 오르면 '도리'라 불리는 돌조형의 신사 입구가 서 있었다. 석등이 좌우로 배열된 참배 길을 따라 중앙 광장을 지나 높은 계단을 오르면 검회색 기와로 덮인 신사가 나왔다.
군국주의 말엽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교회를 포함한 각급 단체와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조차 이십 리 이상 걸어서 참배를 하도록 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계명이 금하는 우상숭배의 죄로 여겼기 때문에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시킬 전략을 가졌던 일제의 강요는 극에 달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므로 참배가 가능하다는 논리였지만 기독교의 핵심교리에 어긋나는 배도였다. 총회 개최 일주일 전에 대구 시내 각 교회의 당회원(목사와 장로) 전원이 새벽에 신사참배를 함으로써 스스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포기했다. 이처럼 신사참배의 문제는 한국교회사를 얼룩지게 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해방과 동시에 대구신사의 도리는 파괴되었지만, 신사 건물은 단군신전으로 사용되어오다 1966년에 와서야 우여곡절 끝에 철거됐다. 그래서 현재 달성공원에는 신사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필자가 달성공원을 몇 차례 조사해 본 결과, 이곳저곳에 신사의 유구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사 도리 일부로 확실해 보이는 돌기둥이 테니스장 롤러로 사용되어 오다 방치되어 있고 도리의 받침대로 여겨지는 석재와 기타 유구들 십여 점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도리의 받침대로 추정되는 석재에는 '강산현인(岡山縣人) 해야무남(海野武南)'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립사라는 직책을 가진 '우미노다께오'라는 사람으로 아마도 기부자 중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일제의 잔재가 테니스장의 롤러로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통쾌한 느낌이 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다. 비록 민족사와 교회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지만 지금이라도 재정비가 시급하다. 한국교회사가인 민경배 박사는 신사참배 강요시기의 한국교회를 일컬어 '타도 타버리지 않는 숲'이라고 했다. 그토록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교회에도 불 같은 시련이었다는 의미다. 수막새 한 조각이 신라 천 년의 미소를 보여주듯 역사에서 작은 유적 하나의 가치는 실로 크다. 달성공원은 명백히 우리 지방 교회사의 한 장소다. 그러기에 유구들이 사라지기 전에 하루빨리 자리 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라도 말이다.
박창식 달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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