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족구왕

족구장에서 유쾌하게 풀어낸 '청춘'들의 고뇌

영화를 보는 내내 깔깔거리게 만드는 독창적이고 유쾌한 독립영화 한 편이 있다. '족구왕'은 '이공계 소년' '서울 유람' 같은 단편영화들을 통해 마니아들 사이에서 알려진 신인감독 우문기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되어 관객의 호평을 받으며 '인디계의 블록버스터'라는 재미있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영화처럼 홍보문구도 뻔뻔해서 패기가 넘친다. "'군도' '명량' '해적' '해무'를 잇는 5대 블록버스터 그 마지막 주자!" 하하하! 절대로 5대 블록버스터에 들어갈 일은 없을 텐데도 눈은 높다. 게다가 여름 블록버스터 빅4에 필적하는 강력한 재미를 주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큰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강점이 많다. 무명의 배우들이 손을 거의 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환경에서 벌이는 작은 이야기는 블록버스터를 볼 때와는 다른 신선한 재미를 준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소소하고 귀여워서 낄낄 웃게 만든다. 일상에 밀착된 코미디 상황은 웃기고도 씁쓸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작은 영화의 장점들을 잘 끌어내고 있다.

식품영양학과 복학생 만섭(안재홍)은 학교의 족구장이 테니스장으로 바뀐 것을 발견하고 총장과의 대화 시간에 족구장을 다시 만들어 줄 것을 건의하지만 주변 학우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런데 의외로 함께 영어 수업을 듣는 캠퍼스 퀸 안나(황승언)는 엉뚱한 만섭에 관심을 보이고 만섭은 급기야 안나의 썸남인 전직 축구 국가대표 출신 강민(정우식)을 족구 한 판으로 무릎 꿇리기에 이른다. 이 역사적 족구 경기를 촬영한 동영상이 교내로 퍼져 만섭은 찌질이 복학생에서 슈퍼 복학생 히어로가 되고, 취업 준비장같이 지루하던 캠퍼스는 족구 열풍에 휩싸인다.

족구 하나로 학교를 평정한 사나이만 가지고 영화를 끌어가기에는 약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이야기 안에는 지금의 청춘들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포진되어 있다. 취업 문제, 스펙 쌓기, 연애 문제, 학교의 실용주의 정책으로 인한 폐해, 등록금 부담과 부의 양극화, 외모 차별 문제 등. 영화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청춘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물정 모른 채 막 제대한 복학생 만섭은 "그냥 재미있어서 한다"는 족구에 목숨을 건다. 그의 족구 철학의 진정성이 마침내 꽃을 피우자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진다. 허세로 보이지만 열정 가득한 만섭의 행동은 사랑스럽다. 남의 시선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지금 현실에서는 사치가 되어버렸는데, 한 가지 일에 모든 것을 거는 인생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가 미안해해야 한다.

족구라는 시시한 소재와 스포츠 영화가 주는 뻔한 이야기일 것이라는 편견을 거두고 영화를 대하다 보면, 그 촌스러움과 투박함이 오히려 정감 있게 다가온다. 영화는 작은 독립영화답게 세련되지 못해도, 이게 바로 어설픈 청춘이며 그 풋풋한 얼굴에서 빛나는 찬란함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간결하게 주고받는 대사는 촌철살인의 유머를 품고 있고, 뒤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영화는 낡은 것이 된 많은 레퍼런스들을 개성 있게 조리한다. 주성치의 과장되고 슬픈 낙관주의가 만섭과 그의 기숙사 동료들 캐릭터에 잔뜩 투영되어 있고,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의 시공간 이동 판타지가 영화를 수수께끼로 남긴다. 또한 '슬램덩크'에서처럼 다이내믹한 조연들의 활약이 어벙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한다.

젊은이들은 이 영화에서 자신을 좀 더 낙천적으로 대할 용기를 얻을 것이고, 기성세대는 청춘들의 고뇌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응원에는 작은 독립영화가 독과점 스크린이라는 가로막힌 벽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버텨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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