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델포이라는 도시에는 아폴론 신전의 유적이 남아있다. 델포이는 '대지의 자궁', 그러니까 모든 원천이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국가나 개인의 운명을 결정해야 할 때면 이곳 델포이의 신전으로 올라가 신탁을 받았다. 신탁이란 다름 아닌 '예언의 신 아폴론이 맡겨놓은 뜻'이라는 말이다. 이 신전의 입구 머릿돌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한 세기 반쯤 앞선 탈레스 시대에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니 함부로 날뛰지 말고 내게 와서 지혜를 얻으라는 경고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폴론은 결코 그 권위를 독점하지 않았다. 제우스, 아테나와 권위를 나누어 삼등분했다. 이들의 중요성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했다.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포이를 중심으로 아테나 신전이 있는 아테네와 제우스 신전이 있는 올림피아를 각각 이으면 양변이 121㎞의 완벽한 이등변 삼각형이 된다는 신비롭고도 놀라운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3이라는 숫자는 우리의 문화 전통에서도 중요하지만, 그리스 문명에서도 중요했던 모양이다. 이분법적 대립의 딜레마에 빠져 오도 가도 못 하는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면, 발이 세 개 달린 검은 무쇠 솥이 하나 있다. '트리포도스'(Tripodos)라고 하는 이 솥은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남쪽의 코스 섬에 사는 한 어부가 에게 해에서 건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나갔지만, 그물에 걸린 것은 거대한 세발솥이었다. 솥 둘레에는 '이것은 가장 현명한 철학자의 차지가 되어야 한다'는 명문이 있었다.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당대에는 탈레스, 비아스와 솔론이라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세 사람이나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이 세 사람은 모두 자기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서로 미루다 자칫 싸움이 날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차라리 아폴론 신전에 갖다 바치기로 했다. 이게 바로 그 솥이다.
결국 이 세 사람의 현자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잘 지내면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삼현정립(三賢鼎立)인데, 세 가지 힘이 균형을 유지하면서 벌려 서 있는 형국을 솥 '정'(鼎) 자를 써서 나타낸 것이다. 세 점은 면을 약속하는 최소한의 조건이고, 세 발은 가장 불안정한 둥근 솥을 가장 안정되게 균형을 잡아준다. 고대 그리스의 인문을 관통하는 개념도 그래서 '로고스'와 '뮈토스'와 '파토스'의 세 가지로 정리된다. 이들은 모두 언어에 속하지만 문법이 다르다.
'로고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몫으로, 논증하는 언어다. 그것은 듣는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를 말하기에 적합하다. '뮈토스'는 천하의 난봉꾼 제우스의 몫으로, 고백하는 언어다.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참되다고 믿는 것을 단순히 주장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자기가 사실로서 믿는 바를 말하기에 적합하다. '파토스'는 예술의 신 아폴론의 몫으로, 상상하는 언어다. 언어 뒤에 숨은 언어를 읽어내기 때문에 영탄(詠歎)의 언어로 적합하다. 이 셋은 결코 서로가 서로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이성에만 바탕을 둔 논리, 신앙에만 바탕을 둔 고백, 감성에만 바탕을 둔 영탄, 이 모두가 중요하지만 어느 한 쪽에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언어의 세 가지 속성이다.
주어진 목표를 빨리 달성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언어를 다 말할 여유가 없다. 직설법으로 수신자와 발신자가 파이프라인을 통해 주고받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파이프라인이 관통하는 환경과 상황은 아랑곳없다. 목표는 잊히고 발신자와 수신자만 중심이 되어 이원적 흑백논리의 구조에 갇혀버렸다. 세월호!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학살, 기아와 인종차별과 에볼라 전염병 등 이 위기의 지구적 담론들을 우리는 과연 어떤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그 많던 우리의 세발솥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래도 신탁을 받을 때인가 보다.
김중순/계명대 교수·한국문화정보학과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