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석 전 시골 5일장에서 만난 풍경

시장은 시장이었다. "대형마트 때문에 시장에 손님이 없다" "장사가 해가 갈수록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장날이 되자 시장 주변은 사람과 차가 한데 뒤섞였다. 시끌벅적 흥정소리도 아직은 그대로고 '내 나이가 어때서' '안동역에서'와 같은 트로트가 동성로의 아이돌 가수 노래처럼 신나게 울려 퍼지는 것도, 장터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과 묻는 안부인사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 파장 시간은 점점 일러졌고 트로트 음악 소리의 크기도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장사꾼과 같이 늙어가는 손님은 있어도 아이 손 잡고 오는 새댁 보기는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도 나를 찾는 손님이 있고 추석 때 손주들에게 뭐라도 하나 해주려면 조금이라도 팔아야 한다. 추석을 열흘 앞둔 지금, 시골 장날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비가 와도 장사는 계속된다-25일 현풍백년도깨비시장

25일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부산경남지역에 시간당 100㎜ 이상 폭우가 쏟아져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던 그날이다. 대구경북지역도 만만치 않게 비가 왔기에 '장이 서기는 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오전 10시쯤 대구 달성군 현풍면에서 열린다는 '현풍백년도깨비시장'을 찾아갔다. 현풍백년도깨비시장은 매달 0과 5로 끝나는 날에 장이 열린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시장은 열렸다. 상인들은 걱정이 앞섰다. 하나같이 "비가 이래 많이 와가 절딴이네"라고 탄식을 했다. 채소를 파는 노점상 할머니는 "하늘이 하는 일을 우리가 우째 알겠능교. 우짤 수 없이 참고 따라가야지"라며 "비가 와도 장사는 해야 안 되겠능교"라고 말했다. 장사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안 됐는데도 비를 가리기 위해 쳐놓은 천막은 빗물이 가득 차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빗자루나 막대를 이용해 빗물을 바깥으로 밀어내기에 바빴다.

추석을 앞두고 있다 보니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어물전과 과일가게로 향한다. 이날 현풍백년도깨비시장 '마산수산'의 류영선(57) 씨는 얼어 있는 돔배기와 명태 손질하랴, 천막에 가득 찬 빗물 빼랴 오전부터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게다가 한 손님이 5천원짜리 가자미와 6천원짜리 명태 한 마리씩 사가면서 "2천원만 깎아달라"는 통에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류 씨는 "2천원 깎으면 우리는 남는 것도 없다"며 "아무리 싸게 해 드려도 손님 모시기 쉽지 않은 게 요즘"이라고 말했다.

◆여고생 때 들렀다가 아이랑 같이 오는 곳-27일 선산5일장

27일 오전 10시쯤 들른 선산장의 풍경은 '도시촌놈'인 기자가 생각했던 5일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상인들이 목소리 높여 물건을 파는 모습은 TV나 영화에서 보던 시골 5일장의 모습을 빼다박은 듯했다. 시장 상인들로부터 "선산장이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5일장일 것"이라는 자랑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한 상인은 "오늘이 평일에 선 장날이라서 이 정도라요. 주말에 장 서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떠밀려서 오고 간다니깐요"라며 "워낙에 큰 장이니까 주말에는 관광 오는 분도 많심더"라고 말했다.

이날은 희한하게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선산장에 체험학습을 온 듯했다. 아이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군것질거리를 파는 곳으로 향했다. 동작 빠른 몇몇 아이들은 이미 슬러시가 가득 든 컵을 손에 들고 어묵꼬치나 닭꼬치 쪽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상인 이은정(57) 씨는 "어른뿐만 아니라 근처 중'고교생들도 우리 가게에서 많이 먹고 간다"며 "여고생 때 자주 오던 단골손님이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아이와 손 잡고 나타나 꼬치를 사 먹고 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5일장의 상인들은 한 자리에서 20년 안팎의 시간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간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한다.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는 신기한 물건들이 지천인 시장에서 이것저것 사 달라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박은애(39) 씨는 "아이랑 오면 캐릭터 그려진 옷과 장난감에 눈이 팔려서 달래느라 애먹는다"고 말했다. 박 씨는 "선산장이 대형마트보다 농산물은 확실히 싸고 신선한 것들이 많다"며 "이번 추석에 물가가 많이 올라 걱정은 되지만 선산장에서라면 알뜰하게 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손님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이야기가 남아-26일 함창5일장

점심때가 지나면 5일장은 썰렁해진다. 특히 평일에 열리는 장은 더더욱 빨리 썰렁해진다. 26일 오후 3시에 찾아간 경북 상주의 함창5일장은 손님이 손에 꼽을 정도의 숫자만 남아 여유롭게 장을 보고 있었다. 몇몇 손님들은 자신의 단골가게에서 상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동네 사람 이야기, 장터에서 자주 만나던 다른 손님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이다.

차도 다니지 않는 한 귀퉁이에 콩과 녹두가 든 큰 바구니가 햇볕을 받으며 놓여 있었다. 이 바구니는 근처에서 곡물가게를 운영하는 이만수(52) 씨가 팔기 위해 내놓은 것들이었다. 메주콩은 아직 햇콩이 나올 철이 아니라 지난해 수확한 것을 내놓았고 강낭콩과 녹두는 올해 수확한 것이라 한다. 바구니가 있는 길 건너편에는 전기 풍구가 강낭콩을 실한 것과 쭉정이로 분류해내고 있었다. 이 씨는 "햅쌀은 도정에서 출하까지 보름은 걸리는데 너무 일찍 추석이 온 탓에 조생종 벼들만 겨우 출하가 가능했다"며 "곡식이 이 정도인데 사과, 배 등 과일류는 오죽하겠나"라고 말했다.

파장이 될 때쯤 사람들이 호떡 파는 곳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호떡을 굽는 김모(70) 할머니는 "장을 열 때는 장사가 안되더니 장이 끝날 때 돼 가니 사람들이 조금 온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요새 씨앗호떡이니 그런 거 유행한다는데 나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 판다"며 "기자 양반이 먹기에 맛이 있을란가 모르겠다"고 말했다. 기자가 먹어본 김 할머니의 호떡은 어릴 때 시장에서 먹던 옛날 그 맛이었다. 근처 국밥집 사장 부부가 "호떡 2천원어치만 포장해 주이소"라고 했다. 호떡은 3개에 2천원이었다. 김 할머니는 국밥집 사장 부부에게 "싸우지 말고 두 사람이 사이좋게 나눠 잡수소"라며 4개를 비닐봉지에 넣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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