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후 4시쯤 대구 동구 도동의 산 중턱 한 묘소. 억세게 자란 풀들은 봉분을 뒤덮고 있었다. 강대식(55) 동구청장이 낫을 들었다. 왼손으로 한 움큼 풀을 잡고 밑 부분을 낫으로 베어냈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30분이 지나자 묘는 봉곳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비지땀을 흘리며 강 청장과 구청 간부 10여 명이 정성스레 벌초한 곳은 일직(一直) 손씨 문중의 묘소 가운데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57) 회장의 고조모 묘다. 이곳에는 손 회장의 증조부부터 10대조까지 모셔져 있다. 손 회장 조상 묘에 대한 동구청의 벌초는 올해로 4년째다. 지금도 도동에는 손 회장의 일가친척 5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손 회장의 '수구초심'에 기대어
동구청이 왜 손 회장 조상의 묘 벌초에 나선 것일까. 손 회장이 세계적 기업의 수장이고 그의 뿌리가 바로 동구 도동이기 때문이다. 동구청은 내심 이런 정성이 손 회장에게 전달돼 그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인 대구를 찾길 바라고 있다. 그의 방문만으로도 동구청은 얻을 게 많아 지역 발전에도 힘이 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렸다.
손 회장의 아버지 손삼헌(78) 씨는 동구청이 벌초한 묘에서 2㎞가량 떨어진 입석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손종경(1899~1968년) 씨는 벼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1930년대 일본군이 지금의 K2 공군기지 부지에 비행장을 만들면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손 회장의 할아버지 역시 땅을 다 빼앗겼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돈벌이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향했다. 해방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미군이 비행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집까지 부서졌다. 농사지을 땅도 일자리도 없게 되자 결국 1년가량 머물다 다시 일본으로 가 규슈에 정착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손 회장은 1972년 가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머니와 함께 대구를 찾았다.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하고서 미국 유학 전 할머니에게 한국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손 회장은 마을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낙후된 고향 마을의 기억을 2010년 6월 소프트뱅크 '신 30년 비전 발표회'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특히 할머니가 일본에서 모아온 헌옷을 마을 아이들에게 선물로 나눠준 것을 생생히 기억했다. 손 회장은 대구 방문 이후 1974년 자신의 성을 '야스모토'(安本)에서 '손'(孫)으로 바꿨다. 대구가 선조의 고향이란 점을 자각했고 자신의 뿌리인 성을 찾은 것이다.
◆할머니의 선물과 같은 투자 기대
동구청은 40여 년 전 가난한 고향 마을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던 할머니의 선물 보따리처럼, 손 회장이 침체된 대구 경제를 위해 투자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벌초는 손 회장의 '애향심 투자'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다. 이 때문에 2011년 이재만 청장 때 시작한 벌초를 올해도 이어가는 것이다. 그동안 벌초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CD에 담아 손 회장에게 전달했다. 벌초 관련 언론 보도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한 문서도 함께 보냈다. 손 회장의 방문을 희망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2006년 '손정의 연구위원회' 구성까지 검토하며 손 회장의 대구 방문을 추진해왔다.
동구청은 손 회장의 이름을 내세운 관광마케팅도 계획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호인 도동의 측백나무 숲과 손 회장을 연계한 관광 안내판을 내거는 등 다양한 마케팅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손 회장이 대구를 방문한다면 현재의 '측백로'(불로동 불로삼거리~도동 측백나무 숲 3.5㎞)를 '손정의로(路)'로 바꾸겠다는 방안도 있다.
일직 손씨 문중회장인 손용수(82) 씨는 "해마다 잊지 않고 구청에서 나와 벌초를 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며 "이런 정성이 전해져 손 회장이 조상 묘에 절을 하는 것을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강대식 동구청장은 "전 청장 때부터 공을 많이 들여 해온 벌초를 이어가는 건 투자 기대에 앞서 동구가 배출한 세계적인 경영자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라며 "손 회장이 언젠가 대구를 한 번 찾아올 때 동구의 진정성이 전해질 것이다. 나아가 손 회장이 대구혁신도시와 첨단의료복합단지 등에 투자해서 대구 발전에 기여하길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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