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삼천 궁녀 낙화암

부여에 갈 때마다 의문 속에 산천을 헤매다 돌아온다. 백제의 궁녀 삼천 명이 나라가 망하는 날 백마강 벼랑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게 사실인가. 그것이 첫째 의문이다. 둘째는 의자왕이 주색에 빠져 황음무도한 삶을 살다가 결국 나라를 잃었을까 하는 것이다.

의자왕과 삼천 궁녀도 역사 속의 실재 인물이다. 유독 삼천 궁녀는 역사 속 사실에서 전설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사가들의 '뻥'과 '구라'가 역사관이란 미명 하에 도포되거나 첨삭이 자행되기 때문에 역사를 사실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역사학자 E. H. 카아는 "역사가는 사실만을 추종하는 노예도, 사실을 입맛대로 주무르는 주인도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 패자의 입장은 깡그리 무시된 이긴 자의 싸움 일기에 불과한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낙화암은 백제 패망 시 삼천 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집단자살바위이다. 높이 60m에 불과한 낙화암과 그리 깊지 않은 백마강이 삼천 명에 달하는 추락 시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구드레 나루에서 고란사를 왕복하는 유람선을 타고 목측으로 짚어보면 불가능이란 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궁녀들이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한 것이 낙화암의 시초이다. 그 후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여러 비빈들이 이곳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쓰고 있다. 삼천이란 숫자에 대한 첫 언급은 조선조 초 김흔의 '낙화암'이란 시에서 처음 나온다.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紅殘玉碎隨水逝)

그 후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에 삼천 궁녀란 낱말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1962년에 발간된 이홍직의 국사대사전 '낙화암' 항목에 삼천 궁녀가 정식으로 데뷔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다. 삼천이란 숫자는 허풍일 가능성이 높다. 공주대 구중회 교수는 "문인들의 감성적 표현과 망국의 비애를 문학적 상징으로 삼다 보니 숫자가 부풀려진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백의 시 추포가 17수 중의 하나인 "흰 머리털이 자라 어느새 삼천 길(白髮三千丈) 근심으로 인하여 이처럼 길어졌네"(緣愁似箇長)라는 표현처럼 '낙화암 삼천 궁녀'도 뻥튀기 기계에서 나온 말이나 다름없다. 당시 사비의 인구는 5만여 명이었다. 그중에서 군인이 2천500명인데 궁녀가 3천 명이란 얘기는 풍을 쳐도 너무 과했다. 7세기 때 백제보다 국력이 강한 조선의 궁녀 수도 500명 내외였으니 식민사관에 뿌리를 내린 사가들의 주장이 오류의 도를 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의자왕을 생각할 때마다 혼란스럽다. 의자왕은 나라를 망칠 만큼 방탕한 왕인가. 아니면 해동증자란 칭호를 얻었듯이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 간에 우의가 돈독한 정말 자애로운 사람인가. 둘 다 일리가 있는 평가인 것 같다. 나라가 흥할 땐 백성들에게 좋은 임금으로 각인되고 있었지만 내분이 일어나면서 외세의 침입이란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질당하는 군주로 전락한 것이리라.

삼국사기를 보면 "왕이 궁인과 더불어 황음하고 술 마시고 놀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이 간곡히 간했으나 왕은 노하여 옥에 가두었다. 그 후론 간하는 자가 없었다." 재위 16년 3월의 일이다. 세종대왕도 백성들의 과음이 심해지자 "신라가 망한 것은 포석정의 술판 탓이며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도 술 때문이다"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의자왕은 아들이 41명이었고 딸의 숫자는 역사에 밝혀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성은을 입고 아기를 낳은 궁녀는 몇 명이며 성은을 입고도 낳지 못한 석녀는 몇 명인지도 모른다.

초여름 날 하루를 낙화암 삼천 궁녀와 놀기로 작정하고 부여로 달려갔다. 배를 타고 고란사에 내려 물 한 쪽대 마시고 백화정에 올랐다. 철책을 두른 전망대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니 가물어 물색이 뿌연 강물만 흘러갈 뿐 원혼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산길에 노래방에 들러 노래 한 곡 부르고 싶어졌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 궁녀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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