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자유의 언덕

엉킨 시간의 미로속에서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씨네아티스트 홍상수 감독의 열여섯 번째 영화 '자유의 언덕'은 현재 개최되고 있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프리미어로 공개되었다. 곧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뉴욕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며, 공개도 되기 전에 이미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지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연출한 모든 영화가 해외에서 먼저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가 감독 홍상수의 영화는 '홍상수 표 영화'라고 칭할 수 있는 수많은 표징을 가졌다.

우리가 늘 익숙하게 보고 있는 여느 상업영화들과는 거리를 둔 그의 개성적인 영화세계는 큰 영화들의 거대한 서사에 지칠 때면 위안을 주는 신선한 청량제 같다. 이번에도 작은 이야기를 현미경처럼 포착해서 일상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담았다. 이 영화의 유머감각은 여느 홍상수 영화와 다름없다. "그래 맞아, 저거야"라며 낄낄거리며 공감하는 일상의 소박한 유머. 이것이 홍상수 영화의 매력이다.

이번 영화에는 일본에서 사회파 영화나 예술영화에 주로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로 명성이 높은 카세 료가 주인공을 맡아 홍상수 감독 팀과 함께 베니스 레드카펫을 밟았다. 문소리, 윤여정, 김의성, 정은채 등 홍상수의 전작들에서도 활약했던 배우들이 대거 참여하여 자연스러운 소시민의 감정을 담아낸다.

영화는 읽으면서 보는 독특한 서사 방식을 전개한다. 몸이 아파 일상을 포기한 채 산에 들어가 요양 생활을 하던 권(서영화)은 자신의 앞으로 맡겨진 두툼한 편지 봉투를 손에 넣는다. 2년 전 모리(카세 료)라는 일본인 강사가 그녀에게 프러포즈한 적이 있지만 권은 거절했다. 모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녀를 찾고 있던 중. 모리는 권에게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벌어진 일을 기록한 일기식의 긴 편지를 남기고, 권이 그 편지를 읽어감에 따라 영화 속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 영화는 시간 구성을 뒤죽박죽으로 해 넣는다. 시간 구조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장점인데, 이 영화는 읽는다는 것과 본다는 것의 의미 과정 안에 시간을 재배치하여 더욱 신선하게 보인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창백한 안색의 권은 여러 장의 편지 더미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다 넘어지고, 편지 다발은 이리저리 흩어진다. 권은 흩어진 편지 낱장들을 찾아서 정돈해 보지만, 순서는 뒤죽박죽이 되고 없어진 낱장들도 있다. 서울 북촌의 고즈넉한 카페에 앉은 권은 모리의 편지를 읽는데, 시간순은 엉망이 되었다. 따라서 모리의 목소리로 전개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난 일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시간의 순서를 흐트러뜨리는 데 있어, 아무런 연결 논리가 없이 사건들을 배치한다. 그렇게 배치된 사건들은 앞의 사건들에 대한 정보 없이도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이며, 앞뒤 사건 간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영화는 실험한다. 관객도 감독도 이러한 실험에 함께 참여하며, 영화 제작과 관람 사이의 단단한 벽을 무효화시킨다.

이러한 독특한 시간 구조 형식과 함께, 내용적으로는 한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낯선 풍경을 다룬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권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카페 여주인 영선(문소리)과는 친밀하고 따뜻하게 교감하고 애정을 느끼게 되지만,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친절한 게스트 하우스 주인(윤여정)과 쉽게 다가오는 상원(김의성)과는 짧은 시간 안에 속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모리는 신경질적인 낯선 여인(정은채)을 잠시 관찰하지만 말을 걸 기회를 찾지 못한다. 일본인 모리가 서울에 와서 맺게 되는 한국인 군상을 통해 우리는 시간, 꿈, 현실, 여행에 대해 가지는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정해진 각본 없이 배우를 캐스팅한 후 이들과 지내다가 우발적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홍상수 감독의 스타일은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작은 에피소드들에서 웃음을 발견하게 한다. 가공되지 않은 현실 공간에서 전개되는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단조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갑작스레 카메라 줌으로 포착하는 인물의 생생한 표정은 영화라는 환상공간을 우리 각자의 현실에 비추어 감각하도록 한다.

홍상수 영화 색깔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유의 언덕'은 새롭게 등장하는 외국인 주연배우로 인해 우리의 수줍지만 소중한 삶의 습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평론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