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도리사 석탑 앞에서

어느 스님이 매운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한적한 산자락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섬광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에 절을 지어야겠구나!' 스님은 그날부터 절 지을 생각에 매달렸다. 승려의 법명은 아도. 불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세워진 사찰이 구미 해평 송곡리에 있는 도리사(桃李寺)다. 동국최초가람으로 1천600여 년 전인 4세기 초에 세워진 신라의 절이다.

아도화상이라 부르는 스님은 고구려 승려였다. 스님이 신라로 내려온 시기는 불교 포교가 금지되어 있던 눌지왕 때였다. 마침 왕실에 중국으로부터 향(香)이 들어왔으나 아무도 사용 방법을 몰랐다. 이런 와중에 성국공주가 몹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스님이 왕실로 찾아가 향의 용도를 설명하고 공주의 침실에 향을 피우고 밤낮으로 기도를 올렸다. 공주는 얼마 안 가 병이 씻은 듯 나았다. 요즘도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들은 박해와 냉대를 이겨내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듯이 아도화상도 신라의 기득권 세력에 치여 숱한 고생을 했지만 공주를 만남으로써 그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오래전에 가본 적이 있는 도리사를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도리사의 석종형 사리탑을 수리할 때로 기억된다. 그 속에서 신라의 전형적인 전각형 사리함과 부처님의 사리가 나왔다고 매스컴이 엉덩이를 들썩인 적이 있었다.

그때가 1977년이었고 은제 사리함과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음 해인가에 주어졌다. 마침 조계종 본부에서 내려온 스님과는 평소 친분이 있는 사이여서 태조산 산행과 사리 친견을 겸해 이곳 도리사에 온 적이 있었다. 사각의 사리함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이기고도 늠름했고 옅은 미황색의 진신 사리는 전율이 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불타 없어진 몸에서 어떻게 저런 고귀한 빛깔의 물질이 생성될 수 있는가.

며칠 전 신문에 스리랑카 대통령이 부천에 있는 석왕사 주지 영담 스님에게 부처님의 사리 2과를 보내왔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는 소중한 유물이지만 한국에 있는 스리랑카 불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보내기로 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는 순간 도리사의 무언가 모를 빛을 뿜어내는 듯한 사리와 사리함을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도리사로 달려가고 싶었다. 크리스천인 내가 진신 사리와는 하등의 인연도 없고 도리사의 스님과는 눈인사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그곳이 가고 싶어질까. 질병이나 다름없는 나의 '안달 증후군'은 이삼일이면 마이신을 복용하지 않아도 자지러지는 법인데 이번 경우는 아주 달랐다.

사흘 뒤, 신열로 따지면 39도쯤 올랐을 때 도리사로 향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간 탈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았다. 흐린 날씨지만 비가 내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오후 3시께 고속도로나 진배없는 가산~상주 국도를 달리다 '도리사 입구'로 들어서니 일주문 '마빡'에 '해동최초가람성지 태조산 도리사'란 명찰이 붙어 있었다. 체열이 갑자기 36.5도로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주문에서 절까지는 5.3㎞ 정도. 걸을까 하다가 내쳐 달려 꼬부랑 오르막길을 편하게 올라갔다. 내가 살던 고향집도 수십 년 만에 찾아가면 고샅길은 물론 먼 산 능선과 하늘의 햇빛 색깔까지도 몰라보게 변한다는데 겨우 한두 번 가본 옛 절집이 변하지 않고 어떻게 버틸 수 있으랴.

내 기억 속의 도리사 전경 사진을 꺼내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도를 맞춰보니 하나도 맞는 게 없다. 부도탑 옆 높은 곳에 올라서서 소나무 사이로 내려다보니 흐린 날씨임에도 절집의 기와지붕 너머로 안산의 스카이라인이 띠를 두른 듯 선명하다. 비뚤어져 거꾸로 서면 어때, 오기를 참 잘했구나.

왼쪽으로 돌아 보물 470호인 도리사 석탑 앞에 선다. 석탑 앞에 서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 탑은 아주 특이한 형태로 잘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것도 아니다. 내가 볼 땐 엄청 매력 있는 그런 석탑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맨 아래 동생처럼 보이지만 닮았다고 할 수 없는 그런 희귀한 탑이다.

진신 사리 때문에 도리사에 왔지만 사리는 적멸보궁에 존치되어 있는지 친견 가능 여부를 묻지 않고 탑돌이만 하고 왔다. '참새를 참나무 숯불로 다비를 했더니 사리 하나가 나왔네'란 시 한 구절이 입안에서 뱅뱅 돌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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