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벌초를 했다. 최근 내린 비 때문인지 예년에 비해 풀이 많았다. 서둘러 집안 어른, 형님, 아우들과 벌초를 시작했다. 예초기에 시동을 걸고 멋대로 자란 풀에 칼을 갖다대자 잡풀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그런데 조용했던 풀숲이 야단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풀 속에서 생명체들이 마구 튀어 올랐다. 메뚜기를 비롯해 풀무치, 방아깨비, 사마귀 등등. 벌도 보인다. 사람에 놀라고 예초기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해 도망가기 바쁘다. 먼저 몸 푸른 풀무치가 힘차게 풀숲에서 날아오른다. 뒤이어 메뚜기와 방아깨비, 사마귀가 또 다른 풀 속으로 뛰어 달아난다. 날씨도 좋은 날, 웬 날벼락인가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평화를 깬 것이다. 반가웠다. 요즘은 산이나 들에 나가도 이들을 만나기 힘들다. 어쩌다 만나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시선을 끈 것은 방아깨비였다. 방아깨비 뒷다리를 붙잡고 길쭉한 몸뚱이로 방아 찧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한 마리 붙잡아 즐기다 그놈 뒷다리가 부러져 평생 불구자 될까 봐 얼른 풀어줬다. 아직 크지가 않아 별재미는 없었지만 옛날 생각이 났다. 어릴 적 같았으면 아궁이 짚불에 당장 구워 먹었으련만….
요즘은 사마귀도 보기 힘들다. 그놈 두어 마리 붙잡아 동족 살생의 싸움을 시키며 떠들고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추억들이 간 곳 없이 모두 시나브로 사라져 간다.
벌초를 한 후 술을 따르고 조상님의 묘소에 절을 하고 잠시 소나무 그늘에 땀을 식힌다. 묘소 앞에 펼쳐진 먼 산을 바라다본다. 어릴 적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좋은 묫자리는 좌청룡 우백호에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있어야 한다." 아버님의 묫자리가 좋은 자리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좌우의 산줄기를 청룡과 백호의 기상을 받은 자리라고 생각해 본다. 남은 술을 원샷으로 비웠다.
기자의 집안은 손이 흔해 벌초를 해야 할 산소가 많다. 그래서 모든 산소가 명당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뒤 좋은 자리에 모신 분도 있고, 어떤 이유에선지 산속 깊은 곳에 모신 분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무덤 위로 소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도 있고, 주위로 참나무가 우거진 산소도 있다. 참나무 숲에 둘러싸인 산소의 풀을 베어내고 갈쿠리로 풀을 긁어모으자 낙엽 사이로 도토리가 많이 보였다. 그냥 떨어진 도토리일까, 아님 지난가을 다람쥐가 겨우내 먹으려고 숨겨놓았던 도토리였을까. 그냥 둘까 잠시 고민하다가 갈쿠리로 긁어 버렸다.
조상님 산소를 깔끔하게 단장하고 나니 숙제를 끝낸 양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무도 없는 산속에 비록 하잘것없는 곤충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들이 있으면 무덤에 계신 조상님도 외로움이 덜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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