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가을 추억, 14년과의 대담

가수 패티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사랑은 아직 멀리 있는데"라고. 전영록을 닮은 옆집 오빠는 청재킷을 입고 잠자리테 안경을 썼습니다. 오빠는 가을 단풍 아래 기타를 칩니다. 다리가 길어 보이게 하려고 나는 억지로 다리를 꼬아 앉습니다. 그렇게 힘든 다리를 하고서 오빠의 노래를 듣습니다. 노래가 귀로 들리는지 어떤지 여하튼 내 입술은 살포시 떨리고 내 허락 없이 자꾸만 붉어지는 볼은 나를 더욱 촌스럽게 만듭니다. 얼굴이 뽀얀 옆반 여학생처럼 나도 그리 도시틱하게 생겨서 오빠가 나를 그립도록 하고 싶습니다. 오빠는 무뚝뚝하고 따뜻한 멘트를 날립니다. "니 거서 모하노?" 무심한 오빠의 매력적인 말이 그립습니다.

가을 아침 출근길입니다. 가을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걸 보니 아직 나도 살아 있습니다. 첫사랑은 얼마나 유치한지 모릅니다. 지금의 나는 현실로 무장되어 얼마나 유치하지 않은지 모릅니다. 신호 대기된 차 안에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유치해진 오늘 아침이 참 좋습니다.

가수 이선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J, 스치는 바람에, J, 난 너를 사랑해"라고. 전학 온 여학생이 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 여학생 이름에 J가 들어갑니다. 성문종합영어책에는 J로 시작하는 단어가 무진장 많습니다. 책 속에 온통 그 여학생뿐입니다.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달밤에 체조한다고 엄마한테 얄궂은 소리를 들어도 오늘 밤 나는 또 달밤에 체조를 합니다. 안되겠다. 내일은 꼭 말해봐야지, "니 이 문장 해석할 줄 아나?". 모른다고 해도 좋고 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 여학생과 같은 공기로 호흡하며 대화를 한다는 것은 꿈 같은 일입니다. 그 여학생이 다니는 대구 시내 Y학원에 나도 어제 등록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저더러 이제사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 갑다고 좋아하십니다. 버스 손잡이 사이로 힐끔힐금 보이는 여학생의 상냥한 미소로 나는 행복합니다. "니 이 문장 해석할 줄 아나?" 속으로 또 연습해 보는데 떨립니다. 오늘은 그 여학생과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을 저녁 퇴근길입니다. 차 막히는 대구 시내에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대구 시내 Y학원을 지나가는 중입니다. 그 여학생이 학원을 걸어 나오고 그 뒤를 따라나오는 그 시절의 내가 있습니다. 피식 웃으며 영화 같은 나의 추억을 봅니다. 나에게 남은 설렘에게 감사합니다.

유치한 설렘이여, 가을 내내 우리 서로를 사랑하게 하소서!

조옥형<연세아동가족 심리상담클리닉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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