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평양, 아빠는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갔고, 징용에 끌려간 오빠는 소식도 없다. 일경의 만행에 할아버지가 숨을 거뒀으며, 양말 공장 여공들이 트럭에 실려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해방이 된 기쁨도 잠시, 소련군이 들어오며 공산당의 세상이 되었다. 남한에 정착한 아버지의 소문에 삼팔선을 넘다가 검열에 걸려 엄마를 잃어버렸다….'
미국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한 재미교포가 어린 시절 직접 겪었던 일이다. 일제의 억압과 광복 그리고 분단과 전쟁으로 점철되는 비극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겨레의 애달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삶과 인간성의 문제를 소녀의 시각으로 진솔하게 표현한 자전적 소설의 내용이기도 하다. 한국의 내면을 해외에 알리는데도 기여를 한 이 작품의 제목은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이다.
몸소 겪었던 잊을 수 없는 세월, 영원히 수긍할 수 없는 일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연들 때문에 소설의 제목을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이라고 했을까. 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그런 '세월'에 갇혀 있다. 세월호에 탄 수백 명의 젊은 목숨을 한순간 바닷속에 수장시키는 어이없는 참사를 저지르고, 아직도 그 후폭풍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사고가 난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도록 진상 규명과 국가 개조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지고, 피해자 가족들조차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만 돌리고 있다. 이 볼썽사나운 세월의 원흉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한 달 전 출간된 '침묵하는 세월'은 세월호의 여파로 홍역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이런 엉터리 세상이라면 누구라도 제2, 제3의 세월호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데, 정작 탐욕과 부조리에 물든 자기 혁신은 도외시한 채 바깥세상의 개혁을 목청 터지게 외쳐본들 무슨 소용인가.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소인배들이 이제는 사건의 본말조차 퇴색시키며 국민의 순결한 눈물을 거두어가는 오늘, 한 편의 시라도 헌사하며 '떠나보낼 수 없는 세월'을 아파하는 사람들의 위안으로 삼는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風花日將老 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 空結同心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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