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일의 생각] 비밀 데이트

기자는 가끔 열두 살 된 딸 서영이와 비밀(?) 데이트를 한다. 비밀이라는 것도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아내 모르게 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날짜도 없다. 서영이가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비가 내리거나 재시험(再試驗) 때문에 늦으면 마중을 나가는데, 그때 아내 모르게 서영이와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라 해봤자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먹고 싶은 음식을 사주며 노닥거리는 정도이다. 평소 햄버거나 피자 등은 죽은 고기로 만든 음식이라며 잘 사주지 않는데 이날은 예외다. 어떤 날은 분식집에서 참치나 치즈가 들어간 김밥이나 라면 등을 사주기도 한다. 먹성이 좋기도 하지만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서영이는 제비 새끼처럼 잘도 먹는다. "아빠가 웬일이지. 이런 음식도 사주고. 맛있어, 아빠도 먹어?"라며 음식을 아빠 앞으로 내민다. 기자 역시 먹성이 좋지만 이날은 서영이가 먹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듣기 좋은 소리(아기 젖먹는 소리,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 자식 글 읽는 소리) 가운데 자식 입에 음식 넘어가는 소리가 바로 이런 소리인지 새삼 느껴지는 시간이다.

입이 행복해진 서영이는 아빠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잘도 조잘댄다. "아빠, 우리 반에 OO이라는 남자 애가 있는데,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별 이유가 없는데도 나한테 잘 해줘. 어떻게 하지?" "아빠, 엄마한테 잘해. 나한테 해주는 절반만 하면 사랑받을 텐데, 왜 안 해. 해봐?" "지난 디베이트 대회 때 난 밤을 새워가며 자기들 원고를 수정하는 등 애를 썼는데 친구들은 내가 고맙지 않은가 봐?" "그리고 아빠, 괜찮은 스마트폰 사주면 안 돼?"하며 애교까지 부린다.

그땐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면 된다. 그때만은 서영이와 '라포르'(rapport'마음이 통해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형성된 것처럼 느껴진다.

아내는 딸과의 데이트에 대해 질투(?)를 했다. 자기만 소외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반기는 표정이다. 서영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었는지 말을 잘 하지 않거나 문을 잠그는 등 비밀스러운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내 말에 의하면 어릴 때와는 달리 따지고 들기도 하고 따박따박 말대꾸까지 한다고 했다. '헐~' 기자에겐 그러지 않은데, 아내에겐 편하기 때문에, 아님 아내가 만만해서 그런가. 아내는 서영이 속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아내 요구가 아니더라도 기자는 이 시간을 기다린다. 그래서 비가 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아내는 "다음엔 나도 끼워달라"고 했다. 그러나 서영이와 기자는 약속했다. "앙~ 돼요"라고. 아내가 끼어들면 스릴도 없거니와 이런 행복은 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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