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팍타크로에 미친 이 남자 "재미 쏠쏠합니다"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 은메달 민승기 국가대표감독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부 세팍타크로 첫 은메달을 따낸 민승기 국가대표팀 감독은 뛰어난 성적 못지않게 훌륭한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성일권 기자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여자부 세팍타크로 첫 은메달을 따낸 민승기 국가대표팀 감독은 뛰어난 성적 못지않게 훌륭한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성일권 기자

민승기(44'대구시체육회) 여자 세팍타크로 국가대표팀 감독은 요즘 세상 사는 재미를 부쩍 느낀다. 집 근처 주유소에서는 며칠 전 '스타' 대접을 받았다. 지갑을 두고 나와 난감한 상황에서 아르바이트생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외상으로 해줬다. 22일 대구 대원고 체육관에서 만난 그는 "세팍타크로도 이제 국민스포츠가 된 건가요"라며 활짝 웃었다.

◆계란으로 바위에 흠집을 내다

민 감독의 '자랑'은 이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친구들의 부탁이라며 아빠의 사인을 매일 몇 장씩 받아간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중학생 처조카는 세팍타크로 선수가 되고 싶다고 졸라 이모부인 그를 난처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축하 전화 세례를 받는 것은 물론이다.

민 감독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인기'는 인천 아시안게임에서의 선전 덕분이다. 세팍타크로 대표팀은 6개의 금메달이 걸린 이 종목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그토록 바라던 금메달은 목에 걸지 못했지만 남자 3개, 여자 1개 등 은메달 4개를 수확했다. 특히 여자부에서는 아시안게임 사상 최초로 이 종목 은메달을 따냈다.

"금메달이 없는 건 너무 아쉽지만, 현실에 비하면 좋은 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선수들은 중학교 팀이 전국에 하나도 없는 탓에 고교에 와서야 입문하는 실정이거든요. 길거리 쇼핑몰에도 세팍타크로 경기장이 있는 태국 같은 나라들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낯선 길을 개척한 1세대

족구와 비슷한 세팍타크로는 올림픽에서는 볼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뉴욕타임스'는 아시안게임 기사를 실으면서 '뒤죽박죽인 스포츠'(Topsy-Turvy Sports)라며 세팍타크로를 소개하기도 했다. '원산지'인 동남아를 제외하면 아시아권에서도 비인기 종목이기는 마찬가지다.

민 감독은 경희대 1학년이었던 1990년, 세팍타크로를 처음 시작했다. 사회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따려고 다니던 서울의 한 스포츠센터에 팀이 생긴 게 세팍타크로와의 인연이었다. "우연히 세팍타크로 연습을 봤습니다. 그저 신기하기만 했죠. 그런데 태국 팀 초청 경기를 앞두고 부상 선수가 생기는 바람에 제가 불려갔습니다. 제기차기 실력은 좋았던 터라 공을 만진 지 사흘 만에 선수를 시켜주시더군요."

나무줄기로 엮은 듯한 세팍타크로 공은 보기와 달리 딱딱하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몸에 맞으면 꽤 아프다. 민 감독도 첫 경기에서 공이 얼굴로 날아오면 피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상대의 공격이 아웃으로 판정받으면서 '육상선수 출신답다'는 칭찬을 들었던 게 생각나네요. 열심히 하면 트랙에서 이루지 못한 태극마크의 꿈도 이룰 수 있겠다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비록 선수로서 메달의 영광은 누리지 못했지만 1991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은퇴할 때까지 자부심은 컸지요."

◆인생의 스승으로 남고 싶어

민 감독은 현재 대구 3개 팀에서 지도자를 맡고 있다. 대원고, 대구과학대(이상 남자팀)와 대구시체육회 선수들을 가르친다. 서울 토박이지만 '제2의 고향' 대구로 이사온 지 벌써 14년째다. "솔직히 1년만 있다가 돌아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이왕이면 우승 한 번 시켜보자는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대원고 숙직실에 살림살이를 차려놓고 같이 뒹굴었지요. 난생처음 운동을 배우는 아이들을 이끌고 2010년 전국대회에서 첫 우승의 감격을 맛봤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6일 전국체전 참가를 위해 제주로 떠나는 그에게 다음 목표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201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전국체전 우승이라는 대답을 예상했지만, 그의 답변은 다소 의외였다. "물론 뛰어난 성적도 거둬야겠지요. 그래야, 아시안게임을 통해 달아오르기 시작한 이 열기가 더욱 퍼져 나갈 테니까요. 하지만, 학생들에게 '인생의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 더 큽니다. 어려웠던 시절, 제게 꿈을 준 선생님들처럼요."

민 감독은 자리를 일어서면서 세팍타크로 발전을 위한 구상도 귀띔했다. "프로 리그까지는 아니더라도 실업 리그는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은 대회가 연간 5차례밖에 없거든요. 네트 높이를 낮추고, 신축성 있는 공을 쓰고, 규정을 쉽게 고치면 더욱 보편화되지 않을까요?" '세팍타크로에 미친 남자' 민 감독의 표정이 다시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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