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민얼굴에 루주, 내소사

내소사는 멋쟁이 절이다. 멋은 미(美)라는 범주의 정점에 있는 최상위 개념이다. '아름다운 여인'과 '멋있는 여인'을 비교할 때 무게중심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멋 속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잠재하고 있어 단순한 아름다움을 능가한다. 멋쟁이 여인은 화장을 짙게 하지 않는다. 로션 하나로 밑화장을 때우고 루주만 살짝 바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뭔가 허전하면 스카프를 목에 감고 어깨 쪽으로 흘려 내리면 그만이다.

소녀들은 여고 졸업과 숙녀 입문이 맞물려 있는 시기에 화장을 시작한다. 이때 송알송알 여드름 돋은 얼굴에 온갖 크림을 발라보고 눈가에는 아이섀도와 아이라인 그리고 마스카라까지 칠한다. 귀도 뚫고 쌍꺼풀 수술도 한다.

내소사 대웅전도 이 같은 과정을 겪었으리라. 창건 당시에는 여고생처럼 꽃 창살문에 붉고 푸른 색깔을 입혔으며 처마 밑 공포에도 단청을 입혔을 것이다. 비가 오면 소녀들의 얼굴에 먹물이 뺨 위로 흘러내리듯 장맛비 속에선 노출된 대웅전 문살들이 눈물깨나 쏟았으리라.

소녀가 여인이 되는 과정에는 숱한 이야기가 쌓이기 마련이다. 첫 데이트, 첫사랑, 임신과 출산, 육아, 권태, 고부 간의 갈등, 때론 이별 등등 펼쳐보면 아련하고 질펀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랴. 사찰도 마찬가지다. 신축 법당이 나이가 들어 고졸미가 흐르기까지는 정말로 많은 이야기들이 켜켜로 쌓인다.

멋있는 여인 치고 숨은 이야기 몇 자락 정도는 없을 수가 없다. 불후의 명작이나 명시 명곡 명화들은 모두 멋있는 여인들의 슬픈 이야기다. 그런 여인들의 상대역으로 남성들이 등장한다. 가슴속에 숨은 이야기가 없으면 여인의 몸에서나 얼굴에서 멋이 뿜어 나오지 못한다.

나는 은은하게 멋을 내는 그런 여인을 좋아한다. 사찰도 야한 단청으로 칠갑하지 않고 실핏줄이 드러나 보일 정도의 맨살 배흘림기둥이 처마를 받치고 있는 그런 절집을 사랑한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절의 형태와 부속 건물들의 배치가 적절한 가운데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 소리까지 맑게 울리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이렇게 말했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그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을 보고 이렇게 읊었지만 풍우에 단청이 날아간 대부분의 법당들이 이런 칭송을 받아도 전혀 과하지 않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탄생 설화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인 미당이 쓴 '내소사 대웅전 단청'이란 산문시 한 편을 추려 읽어보자.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를 찾고 있을 때, 한 나그네가 이 단청을 맡아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다. "내가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들여다보지 마라."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예쁜 새 한 마리가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의 물감을 묻혀 곱게 단청해 나가고 있었는데,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 마룻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한 마리 불호랑이었다. 중들은 내생에나 소생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라고 했다.'

내소사의 설화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소사 법당 안 오른쪽 천장 밑에 장식으로 끼워놓은 목침만 한 공포 하나가 빠져 있다. 청민 선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유명한 목수를 데려왔으나 그는 3년 동안 나무토막만 깎고 또 깎았다. 장난기 많은 동자 스님이 정성 들여 깎아 놓은 것 중의 한 개를 감추어 버렸다. 목수가 숫자를 세어보니 한 개가 부족했다.

목수는 자신의 신심이 절을 짓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려 했다. 이때 동자승이 나무토막을 내놓지만 부정 탄 물건은 쓸 수 없다 하여 결국 한 토막 자리를 비워두고 법당 짓기를 끝냈다고 한다. 그래서 내소사 법당 안에는 대호 스님이 칠하다 만 빈칸이 허(虛)의 상태로 꽉 차 있고 이 빠진 듯한 빈 공포 자리도 미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번 가을맞이 내소사 여행에서 크게 한 수 배웠다. 모든 삼라는 어느 한쪽이 허전하게 비어 있는 미완일 때 가장 멋이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민얼굴의 여인도 그렇고 맨살 대웅전도 그렇고. 오! 부처님. 마하바라밀다심.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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