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로 인해 생긴 땅의 구멍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시간에 대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시간은 그 땅에 어느 때는 상처로 어느 때는 예쁜 무늬로 새겨져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시간이지만 어디에나 흔적을 남긴다.
동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바라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무표정에 가까운 그 주름진 얼굴에 깃든 시간을 가늠해 본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분명치 않은 콘크리트 계단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을 본다. 루브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모나리자가 아닌 닳고 닳은, 시간이 만들어낸 대리석 계단의 존재임을 체험하고 이 콘크리트 계단에 무늬 진 숱한 감정의 주인들의 이야기들을 상상한다. 어린아이 한 명이 가방을 들고 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아이는 이 계단에 쌓인 흔적 위에 또 다른 흔적을 만들고 있다.
무심히 흐르는 시간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리고 계단에, 벽에, 바닥에, 골목에 무늬를 만들고 있다. 기억과 망각의 음각, 양각으로 뒤섞인 기묘한 무늬, 기쁨과 슬픔, 달콤함과 쓰라림, 희망과 절망, 행운과 불행, 이것이 우리에게는 골목이다.
근대골목디자인 개선사업(1차 동산병원 선교사 주택~성 밖 골목)은 우리의 골목에 새겨진 무늬를 찾아 돋을새김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또한, 역사의 단순 보존이 목표가 아니라, 역사를 능동적으로 연장하며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역사보존이 그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상과 동떨어진 고전적 원형보존이나 박물관식 전시, 관리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 대상과 시간의 범위를 넓혀 실제적 구성원들의 삶과 연계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골목이 경제적 자생력을 가지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때까지 경험하고 누렸던 골목길은 건축가 없는 건축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최소한의 필요에 의해서 덧붙여지며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이 일시적인 과정이 아닌 지속적으로 성장, 진화하고 상호작용하여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탄생된 공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골목은 창발의 현장이며 싹이다. 창발성은 단순한 물리적 법칙으로 정의될 수 없다. 전체는 부분의 산술적 합이 아니며 각각의 특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체로서 나타나는 복잡한 현상이 생기는데 이를 창발현상이라 한다. 실제 도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구역을 정하는 법이나 도시계획위원회 같은 하향식 강제력이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현실과 일상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상향식 힘이 오히려 도시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정점에 달한 지금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라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현상의 반영인 건축에서도 '사유에서 공유'로의 개념이 시작단계이다. 현대적으로 번안된 마을, 마당, 골목 공간을 적용하여 이웃과 함께 아이를 키우고 그들의 상점과 집 앞을 걸으며 상호작용하는 체제이며 첨단의 잠금장치로 사생활 보호와 안전에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건축과 도시가 아니라 빗장을 푸는 개방성과 유연성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소년이 골목을 걸으며 미래를 꿈꾸는 그런 도시구조이다.
골목은 우리에게 쉬어가라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가라 한다. 신작로로 모두 나와 함께 부대끼며 뛰지 말고 각자의 골목길을 가라 한다.
오늘도 몰아대는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느라 허덕이는 우리에게 다른 북소리가 들려온다.
골목에서, 과거로부터….
글=건축사무소 him 대표. 건축사 백성기
사진=매일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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