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비자는 가장 힘센 집단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종종 권력이 되고, 슈퍼마켓과 백화점, 비행기 안에서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짓밟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최근 '감정 노동'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정진주(52) 사회건강연구소장은 노동과 건강 문제를 접목한 '사회 건강' 연구에 힘써온 사회학자다. 지난주 강연을 위해 대구를 찾은 정 소장을 만나 사회학자가 말하는 '노동과 건강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회학자, 건강과 보건을 말하다
지난주 대구 중구의 '카페 공감'에서 재밌는 풍경이 펼쳐졌다. 사회 건강을 주제로 열린 이 강연의 강사는 사회학자, 청중들은 의사였다.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건강의 사회적 요인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주최한 행사에 정 소장이 강사로 초대됐기 때문이다.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의사의 영역이라면, 개인이 모인 사회 전체의 건강을 진단하는 것은 사회학자의 몫이다.
정 소장은 "내 직업은 보건의료인 범주에 넣기 힘들다"고 웃으며 운을 뗐다. 그가 처음부터 보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 소장은 "캐나다 연구소에서 일하며 보건을 만났다"고 표현했다. 1996년 북미의 대표적 노동 건강 연구기관인 캐나다 토론토의 '노동건강연구소'(Institute of Work and Health)는 사회학자 연구원 한 명을 찾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북미의 유명한 의학자인 프레이저 머스터드가 만든 펠로우십을 통해 사회학 박사 학위를 가진 캐나다인을 대상으로 모집 공고를 냈지만, 정 소장이 합격하면서 외국인도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원래 그의 관심은 노동 현장에 있었다. 공단 노동자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4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 직접 경험은 책상머리 연구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깨달음을 줬다. "일하다가 더워서 목을 긁으면 몸에 붙어 있던 쇳가루 때문에 상처가 났어요. 하루에 10시간씩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 머리를 감으면 '빨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시커먼 구정물이 나왔어요. 그때 책상 앞에 '노동 조건=건강'이라고 적어 붙여놨는데 캐나다에 있는 연구소로 가면서 이 생각이 결합됐어요."
3년간의 연구소 생활은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그때 처음으로 한 연구는 요통과 어깨 결림 등이 주요 증상인 '근골격계 질환' 연구였다. 컴퓨터를 많이 쓰는 사무직에 흔히 발견되는 질환이다. "이 연구를 의뢰한 곳은 토론토의 유명 신문사인 '토론토 스타'였어요. 1996년부터 신문 제작 업무에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 근골격계 질환을 앓는 직원들이 많아진 것이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됐어요. 일방적 연구가 아니라 노조와 사측, 연구자가 함께 팀을 이뤄 3년간 '참여형 연구'를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또 사회과학자와 간호사, 의사, 작업치료사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원들이 대면 인터뷰, 근전도 검사(EMG) 등을 실시하며 문제를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었던 점도 인상깊었어요."
◆감정 노동, '적정 서비스'가 중요
캐나다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에 와서도 정 소장은 다양한 연구기관에 몸담았다. 민간 연구기관인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또 국책 연구소에서도 근무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구 방향이 바뀌는 국책 연구소에서 한계를 느꼈고, 2012년 '사회건강연구소'를 세웠다. 정 소장은 "연구원 직원은 대학원생 한 명과 내가 전부다. 연구도 하고, 연구 결과를 토대로 사회를 개선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며 연구소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이후 초점을 맞춘 연구는 감정 노동과 여성 노동자였다. 그는 "우리나라 산업이 1, 2차에서 서비스업으로 넘어갔고, 이 산업에 종사하는 대부분 노동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연구 방향도 이렇게 흘러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 무렵 정 소장이 감정 노동을 사회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기자 한 명이 이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기사를 썼고, 그 뒤 감정 노동을 주제로 한 첫 강연 의뢰가 들어왔다. 한 제철소 안 고급 사립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이 요청한 강연이었다.
그의 예측이 맞았다. 최근 감정 노동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지난해 4월 포스코 그룹의 한 임원이 비행기 승무원을 폭행하며 '라면 상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입주민들의 폭언에 시달리다가 분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 소장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스트레스, 사람들이 가진 상처들, 남을 밟고 내가 올라가야 하는 문화 등 이 모든 것들이 응집돼(감정 노동자를 향한) 폭언과 폭력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정 소장은 이 같은 문제의 해법으로 '적정 서비스'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물건을 파는 직원들은 지나치게 많이 웃지 않더라도 제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게 더 중요해요. 오늘 기차를 타고 올 때도 열차 승무원들이 승객들이 지나갈 때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데 왜 그렇게 인사를 많이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과도한 친절보다 적정하고 공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중요해요."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정 소장은 난생처음 네일아트를 받으러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새로운 개념의 노동인 '친밀 노동'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네일아트는 친밀 노동 개념이에요. 이곳을 찾는 고객들은 단골이 많아서 손톱 관리를 받으며 고민을 상담하고,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해요. 노동 형태가 진화하는 거죠.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연구하고, 일반 시민과 의사, 사회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노동과 건강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지식을 교류하는 연구소를 만들고 싶어요."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감정 노동이란? 비행기 승무원과 은행원, 콜센터 상담원 등 고객을 대하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것을 말한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늘어나면서 등장한 새로운 노동 형태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직무에 맞는 감정을 연기하는 '감정 노동자'들은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 정진주 소장은…
사회와 노동, 여성과 건강은 정진주 소장을 표현하는 단어다. 정 소장은 이화여대 사회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캐나다 토론토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노동과 건강'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비영리 연구기관인 캐나다 '노동건강연구소'(Institute for Work and Health)에서 3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정 소장은 10년의 캐나다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등에서 노동 건강과 젠더 건강을 연구했으며, 2012년 사회건강연구소를 설립했다. 같은 해 여성신문사에서 '미래를 이끄는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했다. '돌봄 노동자는 누가 돌봐주나' '반쪽의 과학:숨겨진 워킹우먼의 건강 문제' 등 책을 썼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겸임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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