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중국은 강대국이지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싱가포르는 강대국은 아니지만 선진국이다. 강대국이란 한 국가의 총체적 국력이 매우 큰 경우를 말하는데 반해서, 선진국은 높은 경제 수준과 함께 바람직한 정신문화를 구축하고 있는 나라를 의미한다.
흔히 경제력이나 경제 수준을 선진국의 조건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선진국의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잘사느냐 못사느냐가 아니라, 국민이 소유가치를 추구하느냐 존재가치를 추구하느냐로 가름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 선진국은 단순히 경제성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며, 그 구성원들이 바람직한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있을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 시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신문화의 핵심적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는 공공 의식과 공동체 정신이다. 싱가포르나 일본의 시민들은 높은 질서 의식과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싱가포르는 중국인'말레이인'인도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민 의식과 공동체 정신으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쾌적한 삶의 환경을 구축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은 지진해일과 방사능 유출이라는 대재난 속에서도 공동체를 위하여 법과 질서를 지키는 놀라운 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둘째,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이다.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 권력이나 부를 가진 사람들의 솔선수범과 약자에 대한 배려는 사회지도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상류층 자녀들은 국가가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전쟁터로 달려나갔으며, 미국의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주도하고 있는 '기부 서약'(Giving Pledge)이라는 단체에는 수많은 억만장자들이 전 재산의 50%를 기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셋째,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지켜나가는 정신이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이나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는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으로서 '불의에 의연히 대처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중산층은 경제적 소득수준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할 수 있는 정신을 가져야 비로소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선진국은 물질적 풍요와 함께 수준 높은 정신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물론 우리도 역사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정신문화를 가지고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같은 올곧은 선비들은 대의(大義)를 위하여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경주 최부자의 가문은 대를 이어 가진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실천적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신문화가 오늘날에 제대로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국회의원이 힘없는 대리기사에게 폭언하는 나라, 부의 상징인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재산 다툼과 탈세, 지도층 자녀들의 해외 원정출산 등을 지켜보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절망과 적대감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 더욱이 부패가 관행화되어 관피아'해피아'교피아'군피아 등 사회 도처에 널리 퍼져 있는 구조적인 적폐(積弊)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정의로운 선진사회가 불가능하다. 또한 대규모 행사 때마다 반복되는 무질서와 비양심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공동체 의식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올바른 정신문화의 구축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과 정신이 전도되어 있는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선진국 진입은 고사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어렵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함으로써 건강한 공동체의 육성에 앞장서야 할 것이며, 젊은이들에게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기 이전에 바르게 사는 자세부터 가르쳐야 할 것이다. 입시전쟁과 취업전쟁에서 오직 살아남는 방법만을 배우면서 자라난 젊은이들이 책임지게 될 미래 한국사회의 모습은 참으로 암담하다.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가치관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은 현 세대의 책임이다.
변창구/대가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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