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기차로 5시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만 차편이 왕래하는 빌바오시에 세워진 구겐하임미술관. 자자한 명성만큼이나 특별한 모양새를 한 건축이 아담한 시가지의 언저리에 우뚝 자리 잡은 바람에 이곳의 오래된 미술관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안중에서 멀어진 것 같다. 크기나 내용 면에서 손색이 없는 빌바오시립미술관 앞에 구겐하임미술관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판이 서 있어 그런 인상을 더욱 강하게 받았다.
꽃으로 장식한 대형 강아지 조각상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미국의 네오 팝 작가 제프 쿤스의 설치작업이다. 입구에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 때문에 더 잘 알려진 일본 출신 현대미술가 오노 요코와 조르주 브라크 두 사람의 특별전 현수막이 걸렸다. 브라크전은 타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다. 마티스의 야수파 그룹에서 활동하다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을 창시했다는 역사적 평가와 달리 그의 명성은 두 작가에 가려 2인자처럼 비켜나 있다. 조용하고 침착한 듯 느껴지는 그의 이미지는 저음, 배음, 공명과 같은 단어가 떠올려지는 자신의 그림 세계가 주는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 갇힌 야수들에 비유되던 브라크의 고양된 색채는 곧 온순해진 채 이전과는 다른 질서 잡힌 형태를 추구했다. 바로 세잔의 그림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 시도한 실험이었는데 이것이 20세기 미술의 획기적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입체파 운동의 시작이 됐다. 원색이 뛰놀던 활달한 필치의 캔버스보다 근원적으로 조형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욕망이 더 컸는지 모른다. 이 양식의 특징은 화면에 깊이 있는 환영을 부여하던 지금까지 회화와 달리 캔버스의 2차원적 평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르네상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환영주의와 선 원근법적 공간 구성이라는 유럽미술의 전통과 결별을 나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황해 하고 낯설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류의 그림 역사에서 '평면적인 구성'이 훨씬 더 오래된 전통이고 보편적인 것인데 그림이 갑자기 사유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브라크의 분석적인 화면은 한때 피카소와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차별성이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고 점차 소통이 어려운 추상화가 되어 갔다. 그즈음 브라크의 그림 위에 문자가 등장했고 신문지 같은 종이를 풀로 붙이는 콜라주 작업이 추가됐다. 20세기 미술 전체를 돌아봤을 때 이런 새로운 조형기법의 채택이 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 당시에는 몰랐다. 르네상스 이래 발전을 거듭하며 지속되어 오던 자연주의적 미술의 오랜 재현 방식에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시도로 꼽을 만한 것이지만 필연적인 요구에 의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출현했다. 의미 없이 써 넣은 듯 보이는 문자들은 일상 속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통이 단절되어가는 추상적인 화면 앞에서 본능을 충실하게 따른 작가만이 할 수 있었던 실천이 아니었던가 싶다.
전시는 그의 후반 작품으로 계속 이어졌다. 후반기 브라크의 행보는 좀 느린 듯 조용했다. 격정이나 혼돈의 카오스적인 세계보다 평화롭고 침착한 자세로 일상의 세계를 감각적인 조화와 세련된 지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전시는 이런 변화 단계를 따라가며 브라크의 후반 대형 작품까지 큰 벽의 공간을 활용해 진열했다. 불규칙적인 모양의 거대한 철제 빌딩이 언뜻 보기엔 기괴하고 생뚱맞은 부조화의 극치로 느껴지지만 오늘날 컨템퍼러리 예술과는 쉽게 어울린다. 하지만 어느덧 브라크의 작품은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고전적인 현대(classical modern)라는 용어가 맞는 것 같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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