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1%의 가능성

건강하던 30대 청년이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았다. 활달하고 활기 넘치던 젊은이가 졸지에 내일을 알 수 없는 중증 암환자 신세가 됐다. 지역의 한 대학병원에서 대장의 상당 부분을 절제하고 복강 안에 고온의 항암 약물을 넣었다 빼는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다. 중증 암이 그렇듯, 진짜 고통은 수술 이후에 찾아온다. 항암치료 때문이다. 항암제는 몸 안의 암세포를 녹여 없앤다. 독한 항암제엔 주변의 정상 조직도 견디질 못한다. 골수가 손상돼 면역력이 떨어지고 구역질이 나거나 구토, 배변 장애, 감염, 출혈, 빈혈, 탈모 등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청년은 버텼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어린 아들과 곧 태어날 둘째를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6개월 동안 12회차에 걸쳐 항암치료를 지독하게 받았다. 항암 치료가 막바지로 가던 지난해 6월, 몸에 낯선 변화가 느껴졌다. 몸무게는 줄어드는데 배만 자꾸 불룩하게 나왔다.

항암치료를 맡은 의사는 배를 두드려보고는 "살이 찐 겁니다. 항암치료 다 마치면 살 빼세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배의 상태는 더 나빠지기만 했다. 보름 만에 몸무게가 4㎏ 가까이 늘었고, 허리둘레가 36인치나 됐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받던 날 배가 너무 불러 잠을 잘 수조차 없다고 하소연하자 그제야 배를 통통 쳐본 의사. "복수(腹水)가 찼네. 큰일 났네. CT 찍어봅시다." CT 결과를 본 의사는 "암이 복막으로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깨알 같은 암세포가 복강에 무더기로 퍼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례를 여러 번 보잖아요. 99%입니다. 치료 안 받으면 3개월입니다. 치료를 받으면 1년 정도. 그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항암치료가 끝나는 날,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가족들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병원 측은 진단을 내리기 전 흉부CT와 PET-CT, CEA 검사, 복수검사 결과를 받아 오길 권했다.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담당의사는 "암이 재발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며 이뇨제를 처방했다. 이뇨제를 먹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복수가 2ℓ 빠졌고, 허리둘레는 8㎝ 줄었다. 4개월 뒤 최종 진단 결과는 '재발 아님'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기까지 환자와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같은 얘기라도 의사와 목숨이 걸린 환자가 느끼는 체감 정도는 완전히 다르다. 환자는 "암의 재발을 99% 확신했다면 나머지 1%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검사를 강하게 제안했어야 했다"며 "시한부 인생을 선고하기 전에 좀 더 정확한 검사와 확신이 있어야 했다"고 분개했다.

지역 의료기관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충성도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역민들의 지역 의료기관 진료비율은 2011년 92.1%, 2012년 92.3%, 지난해 92.4% 등으로 전국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런 사례가 나타날 때마다 "아프면 서울로 가야 된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철저하게 갑을 관계다.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환자는 그들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하지만 시한부 선고를 내리면서 모든 가능성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문제가 있다.

대구 지역 대학병원들은 치열한 환자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저마다 '환자 중심 병원'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병원'을 내세운다. 환자 중심 병원은 환자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높았던 지역민들의 충성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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