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하나에 웃음이, 감 하나에 인심이, 감 하나에… 이렇게 윤동주 시인의 흉내를 내며 청명한 하늘에 매달린 감을 보고 있다.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조병화 시인의 시 '가을'의 마지막 두 행이다. 마을 곳곳에는 시인이 본 것 같은 깊고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서리 내린 감나무에 감잎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마른 가지엔 눈부신 주홍색 감들만 남았다.
우리 집에도 대봉감나무가 두 그루 있다. 뒷마당에 있는 감나무는 늦봄에 전지를 해서인지 감잎만 무성할 뿐 감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토담방 뒤에 있는 감나무에는 가지가 휘어질 만큼 많은 감이 달려서 말 그대로 감 풍년이다.
대봉감은 홍시로 먹거나 껍질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 먹으면 좋다고 한다. 감 색깔이 붉어지기 시작하자 조급증이 난 나는 손닿는 곳에 있는 감을 따서 얇게 썰어 말리기 시작했다. 수분이 날아간 감 조각은 떫은맛이 사라지고 간식으로 먹기에 적당한 단맛을 내주었다. 남편은 익지도 않은 감을 딴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감 말랭이 만드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도깨비바늘이 옷에 달라붙는 것도 아랑곳 않고 틈틈이 토담방 뒤로 가서 감을 땄다.
태풍이 없었던 올해는 집집마다 감이 풍년이다. 예년 같으면 다들 잘생긴 감은 공판장에 내보내고, 모양이 고르지 않거나 굵지 않은 허드레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거나 익혀서 홍시로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폭락한 감값 때문에 마을에서는 감을 공판장에 내지 못한 집이 많았다. 시장에 내다 팔면 한 박스에 오천원, 만원 정도밖에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박스 값이나 감을 딴 수고비조차 되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쉰다.
땡감을 팔지 못한 사람들은 벌써부터 곶감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곶감은 저장성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놓으면 약간의 수입원이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모두 감을 깎고 있었다.
어르신들이 집에서 곶감을 만드느라 분주한 바람에 며칠째 마을회관이 텅 비었다. 이러다 곶감값마저 폭락해서 지금 하고 있는 수고가 무위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어르신들만 사는 집에서는 감 딸 사람을 구하지 못해 첫서리 내린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감이 그대로 매달려 있다.
감이 흔해지자 감을 나누는 인심이 넉넉해졌다. 오후에 남편과 둘이서 마늘을 심고 있는데 창익이 할머니께서 맛이 괜찮다며 단감을 한 보따리나 갖다 주셨다. 차 한 잔 하자는 뒷집 미용 씨의 전화를 받고 찾아갔더니 먹감을 한 바구니 따서 건네준다. 노인회장님은 곶감을 말리는 재미가 그만이라며 외발 수레에 감을 두 포대나 싣고 오시고도 따로 한 자루를 더 보내주셨다.
그 덕분에 나도 감 부자가 되었다. 우리 집 감은 따서 도시에 사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동네서 얻은 감을 가지고 다양하게 활용해보았다. 몸에 좋다는 감식초를 만들어보려고 항아리에 감을 집어넣고 비닐로 밀봉해두었다. 토담방 마루에 껍질 깎은 감을 채반 가득 늘어놓고 곶감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베란다에는 홍시용 먹감들이 얌전히 앉아있다. 일찌감치 만들어둔 감말랭이를 들고 지인들을 찾아가면 이젠 시골사람 다 됐다는 감탄사도 듣는다.
우물처럼 마음을 시리게 하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들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제각각의 애환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감 농사가 잘 됐기 때문에 더 늘어난 노동시간과 줄어든 수입은 풍년의 그늘이라 할 수 있겠다.
서리를 맞은 뒤 더욱 붉어진 감을 까치들이 쪼아 먹고 있다. 까치를 피해 땅에 떨어진 감들은 담장 아래 옹기종기 모여 햇볕을 쬔다. 감 하나에 웃음이, 감 하나에 인심이, 감 하나에… 이렇게 윤동주 시인의 흉내를 내며 청명한 하늘에 매달린 감을 보고 있다.
감이 풍년이라서 인심은 후해졌지만, 넉넉해진 인심의 반대편에 곶감처럼 쪼그라들었을 농가의 수입을 생각하니 해맑게 웃을 일만은 아니다. 하얗게 분이 나도록 곶감이 잘 마르면 이웃이니까 특별히 싸게 주겠다는 미용 씨의 말을 들으며 다가올 설날 선물은 곶감으로 해볼까 생각 중이다.
내일은 홍시 살을 발라 넣은 양념으로 김치를 버무릴 것이다. 이래저래 몸이 바쁘고, 덩달아 마음까지 조급해지는 농촌의 늦가을이 흐른다.
배경애(귀촌 2년 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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