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고 국제 경제의 '문제아'로 등장하면서 그리스 정부는 공무원의 임금을 최소한 20% 정도 삭감해야 했고 '철밥통'의 고용조건도 일부 변경해야 했다. 아테네와 주요 도시에서 이런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혹독한 구제금융 조건을 수용했던 우리는 금 모으기에 전 국민이 동참한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렸던 그리스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1997년 우리의 위기 극복과 2010년 그리스의 그것을 비교하며 우리는 이들이 너무 기득권을 지킨다고 비판하곤 했다.
이런 비판을 부채질한 것이 그리스 위기가 과도한 복지정책의 결과라는 국내 일부 언론의 잘못된 분석이었다. 경제 위기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그리스의 경우 정치 실패가 우선이었고 이 때문에 경제 위기가 발발했다. 파판드레우 등 몇몇 가문이 그리스 정치를 좌지우지했고 이들의 정실 인사, 부정부패가 성행했다. 1981년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 회원이 된 그리스는 가난한 나라였기에 해마다 국내총생산(GDP)의 4~5% 정도 되는 막대한 지원을 EEC(현재는 유럽연합 EU) 예산에서 받았다. 1970년대 중반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된 그리스는 EU의 회원국이 되면서 경제와 정치를 업그레이드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부정부패, 너무 경직된 노동시장, 복지 분야 개혁이 필요함을 그리스 지도층은 알고 있었지만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 결국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가 도화선이 되어 그리스가 국가부도의 상황에 내몰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일부 국내 언론은 과도한 복지가 망국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논리로 '그리스 부도=과도한 복지'라는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경제 위기가 자아낸 민주주의 위기는 하나도 조명되지 못했다. 나는 지난 9월 말 광주 비엔날레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그리스 경제 위기의 토론자로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그리스 정치학자를 만나 그리스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경제 위기를 초래한 보수정당인 신민당(New Democracy)과 그리스 사회당(Pasok)이 연립정부를 운영 중이다. 5년 가까이 지속된 긴축정책에 지친 시민들은 좌파연합인 시리자(Syriza)를 적극 지지한다. 2014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시리자는 양당을 물리치고 최대 의석을 차지했다. 현재 시리자는 2위의 신민당보다 지지율에서 6%포인트를 앞서고 있다.
양대 정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이들은 조건부 구제금융을 수용하기 위해 항구와 공항 등을 일부 민영화하고 세입을 줄이는 각종 긴축정책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시리자로 대표되는 민심은 이런 정책을 제지하려 한다. 그리스 의회가 1974년 민주화 이후 경제위기가 발발하기 전인 2009년 말까지 비상조치로 법을 비준한 것은 4번뿐이었다. 비상조치에 따른 입법은 60일 안에 법을 비준해야 하고 이렇게 되지 않을 경우 법이 폐기된다. 그러나 2010년 경제 위기 이후 5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무려 28회나 비상조치로 법이 통과되었다. 그만큼 연립정부가 경제 위기를 이유로 비상조치 입법권을 남발했다. 연립정부는 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지만 30번의 비상조치 입법에서 2번이나 비준을 거부당했다. 연립정부 내에서도 지나친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시리자가 구제금융 거부를 공약으로 내세웠기에 이런 포퓰리스트 정당을 지지하는 민심을 우매하다거나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들은 구제금융 수용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긴축정책 이행의 속도와 범위를 문제 삼는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는 이유는 인권을 존중받고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받는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리스 경제 위기는 이런 기본적인 합의조차 무시하며 민주주의를 위기로 내몰았다. 그리스 경제 위기는 여러모로 민주주의의 중요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준다.
안병억/대구대 교수·국제관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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