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문 가치, 안동에서 찾다] ⑥ 안동 명문가 만주 항일투쟁

門中 이끌고 집단 망명…서간도 한인사회 주축으로

중국 동북3성에는 오랑캐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재산과 신분을 버리고 나라 찾는 일을 위해
중국 동북3성에는 오랑캐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재산과 신분을 버리고 나라 찾는 일을 위해 '도만'을 했던 안동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사진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해마다 실시하는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행사. 탐방단원들이 백서농장으로 향하고 있다. 안동 엄재진 기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해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나라사랑봉사단, 학교 교사 및 학생 등을 대상으로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에 나선다. 지난 8월 탐방단들이 동북3성 곳곳에서 항일투쟁 흔적을 둘러보고 있다. 엄재진 기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해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나라사랑봉사단, 학교 교사 및 학생 등을 대상으로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에 나선다. 지난 8월 탐방단들이 동북3성 곳곳에서 항일투쟁 흔적을 둘러보고 있다. 엄재진 기자

향산 선생의 자정순국 이후 숱한 안동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주 등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빼앗긴 땅, 오랑캐의 땅에서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망국의 뼈아픈 고통과 독립에 대한 절절함이 묻은 망명길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향산을 비롯해 선비들의 자정순국이 이어지던 상황에서 명문가를 대표하던 이들은 "죽음으로 대부의 길을 따를 명분이 없으니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 행렬을 이끌고 길고 외로운 항일 투쟁의 길을 위한 결단으로 '도만'(渡滿)을 택했다.

1911년 안동의 대표적 명문대가였던 임하면 천전리 의성 김씨 백하 김대락(1845~1914)과 법흥동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그 대열의 선두에 있었다.

백하의 내앞마을 문중을 시작으로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로 독립투쟁하러 간 사람은 100여 가구 약 1천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재산도, 신분도 모두 버렸다. 나라 찾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영하 30℃를 밑도는 엄동설한과 일제의 감시를 견디면서 열차로, 걸으며 떠났던 망명길은 그 자체가 고난길이었다.

이들은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합니하, 쏘배차 등지에 터를 잡고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등 항일독립투쟁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들의 피와 땀은 만주 독립운동사의 뿌리가 됐다. 100년 전 도만 항일투쟁의 행렬은 당시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바로 그것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만주벌판의 추위도, 악랄한 일제의 총칼도 그들의 도도한 행렬을 막지 못했다.

◆백하 김대락, 국치에 가장 먼저 서간도 망명 결행

안동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문중 백하 김대락은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가장 먼저 서간도 망명을 결단했다. 그해 12월 24일(음력), 6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문중의 청'장년을 비롯한 만삭인 손부와 손녀를 대동했다. 국내를 통틀어 첫 번째의 문중 단위 집단 망명이었다.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1주일을 걸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간 다음 다시 걸어서 압록강 너머 최종 목적지인 유하현 삼원포(三源浦) 이도구(二道溝)에 닿은 것이 1911년 4월 18일이었다. 여정 중간 환인현 항도촌에 머무르는 동안 손부와 손녀가 아이를 낳았다. 증손과 손자가 '적의 땅'에서 태어나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망명객에는 김동삼,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포함됐다.

삼원포 이도구에 정착한 김대락은 1911년 5월 설립된 '신흥학교' 교장에 추대됐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1911년 '경학사'(耕學社)와 1913년 '공리회'(共理會) 결성에 참여했고 '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를 작성했다. 김대락은 만주망명 후 줄곧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藍山)에서 작고했다.

백하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2002년 안동의 의성 김씨 선산에 가묘를 쓰면서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요,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석주 이상룡, 신흥무관학교 설립하고 서로군정서 지휘

1911년 1월 5일 석주 선생은 선조들의 위패에 절을 올리고, 위패를 땅속에 묻었다. 전 재산을 정리해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이날 저녁 집을 나선 일가는 같은 달 25일 신의주역에 도착, 썰매를 구해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했다. 마차 2대로 안동 사람들의 첫 집결지였던 환인현 황도촌에 도착했다. 황도촌에는 처남인 백하 김대락 일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망명객들은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 집결해 한인촌을 만들었다.

석주는 1911년 4월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대고산에서 수백여 명의 망명객들이 모인 가운데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다.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경학사'를 조직, 초대 대표로 추대됐다.

경학사가 중심이 되어 통화 인근의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 서간도 일대에 독립열기가 고조되자 일종의 임시정부인 군정부가 조직됐다.

상해임시정부는 1925년 여름 이상룡에게 초대 국무령으로 부임해달라고 요청했다. 석주는 1년도 안 돼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돌아왔다.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과 후퇴하는 중국 군벌 휘하 군인들의 행패로 인한 동지들의 희생을 지켜본 이상룡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 병석에 누웠다.

석주는 1932년 6월 15일 길림성 서란현에서 74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해골을 고국에 싣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 만인 지난 1990년 9월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가, 1996년 임정묘역으로 옮겨졌다.

26살에 고성 이씨 종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라의 운명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친정도 시가도 양쪽 집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되어 있었다. 양가 일찍 만주벌판에서 오로지 항일투쟁에만 매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동 사람 정착 서간도 '해외 항일운동 중심지'

백하와 석주 등 안동 사람들이 1911년대 정착했던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은 한인사회 자치기구인 '경학사' '신흥무관학교'와 그 모태가 된 '신흥강습소', 독립군들의 특별 군영이었던 '백서농장', 대한독립단 광복군 총영, 교육시설 등 해외 망명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백하 선생 정착지와 맞닿은 삼원포 추가가. 이 마을 대고산 중턱에서 경학사 결사 논의가 이뤄졌다. 서간도로 이주한 한인사회의 자치기구 설립을 위한 논의였다. 1911년 6월 이상룡 선생이 경학사 사장으로 추대돼 한인사회를 주도했다. 이 마을에서 안동인들은 신흥무관학교의 모태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유하현에 정착했던 한인 지도자들은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했다. 김대락도 이 무렵 이주했다.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일정한 군사훈련과 중등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처음으로 갖추었다.

1919년 3'1운동 등 국내 항일투쟁이 활기차게 진행되면서 해외 항일투쟁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19년 4월 한족회가 조직되고 신흥무관학교 확충이 추진됐다. 합니하의 신흥학교는 외진 곳으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품기에 부족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이 많이 사는 삼원포 고산자 부근에 본부를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신흥학우단은 제2군영을 만들어 정예부대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훈련대를 편성했다. 이 특별군영이 백서농장이었다. 김동삼 선생이 농장주로 활동했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385명이 입영해 훈련했다. 백서농장에서의 고난은 이후 항일 유격전에 큰 교훈이 됐다.

지난 8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마련한 만주지역 항일운동사적지 탐방에 나섰던 안동의병장 척암 김도화 선생의 후손인 김동호 씨는 "머나먼 이국땅 만주 곳곳에 흩어져 이제 흔적조차 아득해져 가는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 보존대책이 절실함을 느꼈다"고 했다.

중국 연변박물관 근현대문물부 부연구관원인 허영길 교수는 "삼원포 등 서간도 지역은 안동에서 망명해 온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중심지였다"며 "지금은 대부분 흔적이 없어져 정부차원의 만주 독립유적지 보존이 절실하다"고 했다.

안동 엄재진 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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