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음반 읽어주는 남자] 015B-6집 페어웰 투 더 월드

1990년대 초'중반 우리 대중가요의 스펙트럼을 넓힌 뮤지션으로 015B(공일오비)를 들 수 있다. 프로듀서 정석원과 기타리스트 장호일(정석원의 형 정기원이 쓴 가명)로 구성된 015B의 모태는 최근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고(故) 신해철이 이끌던 밴드 '무한궤도'다. 정석원과 장호일 둘 다 대학 시절 신해철의 부탁으로 무한궤도에서 활동했다. 무한궤도가 해체하자 신해철은 솔로로 나섰고, 두 형제는 역시 무한궤도 출신인 조형곤(나중에 탈퇴)과 함께 015B를 결성한다. 이름을 풀어보면 이렇다. 0=無(무), 1=한, 5B=비슷한 발음인 'Orbit'(궤도).

015B는 1990년 1집을 내며 데뷔했고, 1996년 6집을 끝으로 해체했다. 10년 뒤인 2006년 '파이널 판타지'로 컴백해 이후 여러 작품을 냈지만, 1990년대에 보여줬던 작품성과 감수성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1990년대만을 015B의 전성기로 보자면, 다시 2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청춘의 풋풋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이따금 세상을 향해 삐딱한 시선을 내비친 1~5집, 그리고 이전의 삐딱한 시선을 넘어 냉소와 광기로 가득 채운 세기말 세상을 작가(작사'곡 및 편곡)와 기술자(음향)의 공동 건축으로 구현한 6집이다. 흐름상 최고작은 단연 6집이다.

이 앨범에서 최고로 꼽는 곡은 '21세기 모노리스'다. 한 편의 영화를 '귀로 보는 듯한' 구성이 압권이다. '역사라고 불렀죠 파괴를 믿고 화폐를 믿고 과학이란 종교를 믿었는데'. 철학적인 노랫말은 물론 음악 그 자체로 세기말 멸망 직전 세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법은 작사'곡 및 편곡이라기보다는 '극작 연출'에 가깝다. 당시 웅장한 편곡과 각종 음향효과에 매진하던 정석원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 타이틀곡 '독재자'를 비롯해 '구멍가게 소녀' '타락도시' '마르스의 후예들' 등이 앨범 속 암울한 세기말 세상을 일관성 있게 꾸민다. 물론 '나 고마워요' '나의 옛 친구' '콩깍지' 같은 015B의 전형적인 '청춘물'도 있다.

여기서 015B 특유의 작업 방식인 객원 보컬 시스템이 빛을 발한다. 싱어송라이터이지만 1990년대에 뛰어난 코러스 세션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이 앨범의 연주곡 '성모의 눈물'에서 한국 대중가요사에 길이 남을 환상적인 코러스를 선보인 조규찬을 비롯해 김형중, 이승환, 신경필(윤종신이 소속사 문제로 쓴 가명), 이장우, MGR(박용찬) 등 015B의 끈끈한 협력 뮤지션들이 총출동했다. 유희열도 보컬은 아니지만 작'편곡과 키보드 연주, 생수 따르는 효과음 등으로 활약했다.

뮤지션들이 세기말을 노래하고 연주할 기회는 앞으로 수십 년은 기다려야 온다. 2100년이 오기 직전 말이다. 그때까지 이 앨범은 세기말 세상을 구현한 대중가요 명작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