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는 침몰했고, 해경은 해체됐으며, 구원파는 금수산으로 돌아갔다. 진상규명 특별법은 사고 발생 7개월 만에야 공포됐고, 그 사이 '세월호'는 피곤한 단어가 돼 버렸다. 304명(사망 295명, 실종 9명)이 산 채로 수장된 사건은 어느새 진영 싸움으로 옮아붙었다.
놀라운 일이다. 똑바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폐물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 가증스런 작태를 부린다. 그런 작태가 어쨌든 성공했다는 사실에 절망감이 아득하다. 그런 농간에 놀아났다는 자괴감에 치가 떨리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이젠 가늠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노벨경제학상(2002년)을 수상한 최초의 심리학자이자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은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원제:Thinking Fast And Slow)에서 인간 인식구조에 대한 명쾌하고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시스템이 존재하는데,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시스템1'과 복잡한 계산'관심'노력이 필요한 '시스템2'가 바로 그것이다. 기분 나쁜 상황에서 무심코 욕설을 뱉으려다가(시스템1 작동) 이내 자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시스템2 작동) 경우처럼 이들 두 시스템은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물론 두 시스템이 따로 작동하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시스템1이 즉흥적이고 자동적인 반응인 데 비해 시스템2는 지속적인 집중력이 필요한, 꽤 수고로운 과정이라는 점이다. 시스템2가 작동하는 동안 인간은 피곤하고 번거롭게 느낀다. 아울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일을 동시에 처리하기가 불가능하다.
하나에 집중하면 나머지는 못보고 넘어가기 마련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자기만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다.
대표적 사례가 유명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다. 학생 6명을 두 팀으로 나눠 흰색과 검은색 티셔츠를 입힌 뒤 공 2개를 주고, 같은 색끼리 농구공을 주고받게 한다. 이를 지켜보는 피험자에게 흰색 티셔츠끼리 패스한 것만 세도록 지시한다. 피험자들은 열심히 집중해서 패스 수를 센다. 공 돌리기가 끝난 뒤 엉뚱하게 이런 질문을 한다. "혹시 고릴라를 봤나요?" 피험자 중 절반 이상은 못 봤다고 답한다. 그런데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 고릴라 복장을 한 학생이 무대 가운데에서 가슴을 두드리며 킹콩 흉내를 내고 있다. '어떻게 저걸 못 볼 수가 있지?'
배가 침몰했고, 사람이 죽었다. 백화점이 주저앉았고, 한강 다리가 무너졌고, 지하철이 불탔으며,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이들 사고를 지켜본 심정은 전혀 달랐다. 안타깝고 비통하고 분노했지만 적어도 생사람을 수장시킨 것과는 달랐다. 실낱같던 희망은 날이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면서 절망으로 바뀌었고, 어느새 끝 갈 데 모르는 분노로 치달았다.
그러나 시스템1의 작동은 여기까지로 끝나야 했다. 가슴속 뜨거운 분노와 울분을 담은 채 머릿속 차가운 분석과 판단이 시작되면서 시스템2로 넘어가야 했다. 수고롭고 피곤하고 지속적인 집중력과 인내력이 필요하더라도 그랬어야 했다.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세모그룹, 구원파, 유병언을 분노와 흥미의 불쏘시개로 내세우더니 난데없이 해경을 초토화시켰고 급기야 다이빙벨로 모든 판단기능을 마비시켰다. 산 채로 제 자식이 수장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던 부모들은 턱도 아닌 요구를 들어달라며 생떼를 쓰는 집단으로 매도당했다. 300여 명의 목숨 값을 지방선거 표 값과 저울질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지 알고 싶다'는 바람은 '국가안보와 직결된 문제'라는 헛소리에 묻혀버렸다.
위정자들은 흰색 티셔츠끼리의 공 돌리기에 집중하라고 주문한다. '세월호의 진실'이라는 고릴라가 무대 한가운데에서 아무리 힘껏 가슴을 두드려도 보지 말라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긴 뒤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고릴라'들이 지나간 것일까? 제발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시스템2를 작동시켜보자. 비록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훗날 우리 후손들이 손가락을 치켜들고는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라고 핏발 선 고함을 지를까 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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