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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의 마을…조선시대 450여 명 거주 화전정리사업으로 떠나

1834년 제작한 김정호의 '청구도'에 따르면 금오산 내성 안 마을에는 40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호구당 평균 4, 5명으로 잡으면 약 160~200명이 내성 안 마을에 살았다고 추론할 수 있다.

1994년 금오산 문화재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금오산성에는 외성리와 내성리를 합해 451명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안 되는 숫자이지만 산속에서 거주했음을 고려한다면 결코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없다.

1970년대 화전정리사업으로 산을 내려온 주민들에 따르면 해방을 전후해서 10여 호가 성안마을에 살고 있었다. 해방 후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주둔한 미 공군 통신대와 국군의 주둔이 다시 한 번 성안마을에 활기를 가져 왔으나 대부분 통신대와 관련한 일을 하는 고용인들이었고, 이들은 군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산을 떠났다.

금오산 화전정리사업(1974년)을 위한 조사대장에 나타난 자료에 따르면, 성안마을 토지는 10명이 소유하고 있었다. 평균 경작 면적이 2천500평 정도이고, 가장 많은 토지를 가졌던 사람은 4천880평이다. 500평 미만 경작자도 3가구가 있었다.

당시 화전정리사업이 한창일 때, 성안마을 사람들은 금오산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교통이 편리한 산 아래보다, 비록 교통은 불편하지만 금오산 안에서 사는 편이 더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가뭄도 가난도, 세상사의 시끄러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안은 조선시대 한때 450명이 넘는 인구가 되었던 적도 있으나 1970년대 화전정리사업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그 흔적만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조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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