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애증의 대상-상사
삼겹살, 치킨, 오징어와 더불어 직장인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술안주가 하나 있다. 바로 직장 상사. 매일 얼굴을 봐야 하고 술 마신 다음 날도 얼굴을 봐야 하는 직장 상사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싶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가장 좋은 술안주다.
그런가 하면 부모, 선생님, 친구와 더불어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사람도 바로 직장 상사다. 직장 내에서 나의 실수에 대한 방패가 될 때도 있고 '고르디온의 매듭'과 같은 꼬인 업무를 해결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칼이 되어주기도 한다.
tvN 드라마 '미생'이 인기를 끌면서 직장생활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직장 상사'라는 존재는 직장인이라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며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애증의 존재로서의 직장 상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주 매일신문의 토요일은 직장 상사 욕을 시원하게 하는 돗자리를 깔아보고자 한다. 혹여 신문을 읽다가 귀가 간지럽다면 어디선가 당신의 존재가 '애증의 직장 상사'가 돼 누군가의 입길에 오르고 있을 확률 100%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당신은 어떤 직장 상사랑 일하고 있나요?"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핑크빛 답변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토록 후배들의 고충이 심각할 줄은 몰랐다. '직장상사'라는 단어가 떨어지기 무섭게 후배들의 고충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여러 에피소드를 봇물 터진 듯 쏟아내기도, "제발 생생하게 기사를 써서 세상을 바꿔달라"며 애원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직장상사들 아래서 일하는 '미생'들의 살아있는 에피소드를 모아 각색했다. 사연을 읽으며 누군가는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하는 위로를 받기도, '우리 상사랑 똑같다'며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가족인 듯 가족 아닌, 우리 상사(A씨'25'국내 대기업 근무)
"밥 먹으러 갈 사람?" 오늘도 우리 팀장은 저녁시간(=퇴근시간)이 되자 큰 소리로 '식구'(食口)를 찾는다. 팀장의 한마디에 부서원들의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흘러가는 시간은 1초가 1시간 같다. '제발 누군가 답해 주세요.'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지만 부서 선배들의 시선은 입사 3개월 차인 나에게 쏠린다. 결국 팀장과의 저녁식사는 오늘도 내 몫이다. "팀장님, 식사하러 가시죠." 애써 웃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우리 A씨도 밥 먹을 사람이 없었구나.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얼른 퇴근하고 방에 들어가 미뤄뒀던 드라마를 보며 마음 편히 식사하는 게 얼마나 편한데. 내 속도 모르는 팀장이 밉다.
우리 상사는 '팀원을 가족처럼 대하라'는 신념을 가졌다. 이 때문에 팀원들과 사생활을 공유하는 것도 신념을 지키는 일 중 하나라고 여긴다. 사생활 수집 통로는 다름 아닌 사생활의 보고, SNS다. 입사 첫 회식자리에서 팀장과 신입사원들은 반강제로 '친구'가 되었다. "절대 받지 마라"는 친구의 조언이 있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회식이 끝나고 팀장의 친구 신청을 수락했고, 그날 이후 내 SNS는 나 아닌 내가 주인이 되었다.
'띠링' 페이스북 알람이 울렸다. 팀장이다. "A씨, 나는 야근 중^^." 집에서 올린 우스운 동영상 아래에 팀장의 댓글이 달렸다. 그 순간 나의 달콤한 저녁 시간은 가시방석 위에 놓였다.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친구의 조언이 머리를 스쳤다. "새 계정을 파라." 내일은 반드시, 기필코 새 계정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내 일도 내 일, 상사 일도 내 일(B씨'29'공기업 근무)
우리 상사는 나를 아이폰 '시리'(Siri: 아이폰에 탑재된 음성인식 비서 서비스)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입사 1년 차 신입사원이다. 1년이 다돼가지만 업무가 손에 익질 않아 빠릿빠릿하게 일을 처리하는 건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업무 처리만도 버거운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있다. 우리 부장의 '잔심부름'이다. 손과 발만 있으면 몇 분 만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모두 내 몫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다른 부서로 전화 연결해라' '옆 부서에 가서 문서를 받아와라' 등이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부장님을 도왔다. 모든 것이 업무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티끌 같던 심부름도 쌓이니 태산이 되었다. 이제는 업무시간 동안 내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심부름이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업무와의 연관성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부장 책상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는 일부터 음료를 배달하는 일까지 한다. 며칠 전, 부장은 스테이플러로 찍혀 있는 A4 용지 뭉치들을 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우리도 이면지 좀 쓰자고~"라며 종이를 일일이 풀어내는 일을 시킨 것이다. 업무의 기본을 다진다는 생각으로 돕기 시작했지만, 잔심부름으로 정작 내 일이 밀려 소중한 저녁시간이 사라질 때면 기본은 좀 지켜달라고 말하고 싶다.
◆조급증에 걸린 우리 상사(C씨'29'국내 대기업 근무)
점심시간 30분 전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의 설렘? 아니다. 성격이 급한 우리 팀장은 정오에서 단 1분만 늦게 모이더라도 화를 낸다. 만남의 장소는 언제나 점심을 예약한 식당이다. 이동 시간을 줄이고자 정한 규칙이다. 식당에 도착하면 음식은 이미 나와 있어야 한다. 오전 11시 30분에 예약한 식당에 메뉴를 주문하고 12시 정각에는 점심을 먹기 시작해야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이 팀장의 철칙이다.
한번은 엘리베이터가 늦게 와 3분 정도 식당에 늦게 도착했다. 3분간 내 휴대폰에는 3통의 전화가 왔다. 빨리 오라는 선배들의 전화였다. 도착한 식당에서 팀장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고, 나는 그 후로 11시 30분이면 점심식사를 하러 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팀장의 조급증은 식당에서도 이어진다. 만약 미리 예약한 음식이 나와 있지 않으면 종업원을 불러 화를 낸다. 나머지 팀원들은 종업원에게 눈짓으로 미안함을 표한다. 먹는 속도도 팀장을 따라가야 한다. 밥을 먹었는지, 입에 밥을 털어 넣은 건지 모를 정도로 밥을 먹다 보면 시계는 12시 23분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12시 30분 전에 끝난다.
이런 팀장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뭐가 그리도 급하게 살아왔을까. 나도 일에 치여 살다 보면 저렇게 되지는 않을까. 배울 점이 있는 상사가 좋은 상사의 기준이라면 그는 나에게 좋은 상사다. 그를 보고 있으면 '나는 여유를 가지며 살아야지'라는 마음을 되새기게 되니까 말이다.
◆부하직원 보고를 귓등으로 넘기는 상사(D씨'34'공기업 근무)
홍보팀에 근무하다 보니 홍보 관련 판촉물 제작도 나의 몫이다. 특히 연말이 되면 다이어리나 수첩 등을 제작해서 거래처나 올해 회사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돌린다. 우리 회사 부장님은 연말이 될 때마다 홍보팀 직원들 속을 뒤집어놓는데, 그 방법이 심히 부하 직원들 뒷목 잡게 만든다.
판촉물 제작 업체와 함께 몇 날 며칠을 상의하고 고민해서 나온 다이어리, 달력, 수첩 시안을 부장님께 보여드렸다. 부장님은 시안을 대강 살펴보고는 "괜찮네. 이렇게 제작해"라고 결재를 해 주셨다. OK 사인이 난 시안을 제작 업체에 넘기고 일주일 뒤 다이어리, 달력, 수첩 세트 300개가 도착했다. 부장님께 한 세트를 갖다 드렸더니 갑자기 표정이 구겨진다. "아니, 누구 허락 맡고 이런 거 제작한 거야? 디자인이 이게 뭐야, 여기 있어야 할 로고가 왜 저기 가 있는 거야? 속지는 왜 이렇게 후져? 야, 이거 다시 제작해!"
보고서에 시안 디자인, 종이 질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보고하면 뭐하나. 제대로 읽어보질 않는데…. 결국 제작 업체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부장님이 원하는 대로 다시 세트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부장님 때문에 OK 사인이 나도 겁난다. 언제 KO펀치 한 방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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