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칼럼] 189년과 2014년의 십상시(十常侍)

189년. 중국 후한(後漢) 시대. 12대 황제인 영제(靈帝'재위 168~189) 시기는 환관의 치세라고 할 만했다. 이들 가운데 핵심인 10여 명의 환관(십상시'十常侍)들은 자신들의 방패막이가 되어 준 영제가 죽자 영제의 처남으로 자신들을 제거하려던 하진(何進)을 죽이는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반 환관파의 중심인물인 원소(袁紹)의 군대에 의해 도리어 도륙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환관들을 포함해 2천여 명이 죽는다. 역사는 '십상시'들이 본분을 잊어버린 채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황권을 능멸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함으로써 결국 후한이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적고 있다. 이름하여 '십상시의 난'이다.

그런데 2014년. 베이징의 자금성(紫禁城)도 아닌 대한민국 한복판 서울의 정치권을 '십상시' 폭풍이 강타했다. 한 신문이 지난달 28일 국정을 주무른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의 동태에 대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는데 거기에 '십상시'라는 단어가 쓰인 때문이다.

이 '십상시'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1998년 정치 입문 때부터 모셔온 3인의 비서관들을 포함해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 등 10명이 포함돼 있다. 그 중심에 박근혜정부의 막후 실세로 지목돼 온 '정 실장' 정윤회 씨가 있다. 특히 정 씨를 중심으로 3명의 핵심 비서관들은 정치권에서 '문고리 권력' 또는 '환관 권력'이라고 불린다. 듣기에 거북하지만 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박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가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은 2012년 대선 직전 새누리당 내부의 견제로 '정리'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박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정 씨는 2007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그대로다. 지난 16년 동안 박 대통령과의 거리에 한 치의 변화도 없다. 권력자와의 거리는 파워에 반비례한다고 하고 직급의 높낮이가 아니라 권력자와의 거리가 권력의 척도라는 정치권의 속설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들은 파워맨이다.

가끔 대통령을 만나는 국무총리나 장관, 거물 정치인들도 눈만 뜨면 박 대통령을 만나는 이들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권력자의 비서실은 그런 거다. 그런데 그걸 영 마땅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을 두고서야 어찌 질투와 시기 그리고 중상과 모략이 없을 수 있을까. 대통령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눈엣가시고 걸림돌이다. 특히 이들이 '그 좋은 자리'를 20년 가까이 독과점하고 있으니 공격의 강도는 더해만 간다. 그래서 '십상시'라는 험악한 말까지 동원된 것일까?

그러나 역대 권력자들 치고 비서 정치와 측근 정치에 의존하지 않은 이가 없었음을 우리 정치사는 증언하고 있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나 민주화 지도자 출신 대통령들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문고리 권력'이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생겨난 신조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실세'라는 정치인들 가운데 비서 출신 아닌 이를 찾기가 오히려 힘들다. 지금 문고리 권력을 공격하는 이들 가운데도 자신들이 문고리 권력 출신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주목할 만한 대목은 십상시로 지목된 인물들 대부분은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권력의 생리에 대해 더 잘 알고 더 많은 정보와 인맥을 갖출 수 있어 정치권에서 단기간 성장하기에 유리하다지만 이들은 다른 선택을 할 것 같다. 비리나 범법으로 낙마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지 않는 한 이들은 박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하고 함께 청와대를 나올 공산이 큰 인물들이다. 특히 문고리 3인방은 이른바 '순장조'로 불린다.

그런 점까지 고려해서 '환관 권력'이라는 작명을 했다면 당사자들은 달갑지 않겠지만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십상시'에 이르러서는 영 듣고 말하기 거북하다. 비서 정치, 측근 정치의 발호를 경계하는 경고성 충정을 담고 있다면 참을만하다. 하지만 이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패자의 저주 같다는 생각에서는 섬뜩함마저 든다.

어디 가져다 쓸 말이 없어서 '십상시'라는 말을 차용해 오는지. 조어능력과 해박한 역사지식은 감탄할 만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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