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도찰방역으로부터 경남 거창의 경계인 우두령까지의 역로상에는 작내역과 장곡역이 30리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 오늘날 국도3호선과 대부분 일치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성주목 지례현 영역에 속한 역이었지만 김천도찰방역의 속 역으로서 찰방역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장곡역은 우두령에 인접하면서 무주'거창과 인접한 지역적 특성상 전략적 요충지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다. 지례현 관할에 있던 김천역의 두 속 역, 작내역과 장곡역 순시에 나선 신임 도찰방 이중환의 노정을 함께 따라가 보자.
◆까마귀를 감동시킨 윤은보와 서즐의 효행
이중환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작내역 역관에 도착했다. 역관 앞에는 양쪽에 도열한 역리들이 신임 찰방의 순시에 예를 갖춘다. 어젯밤 읽은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에는 작내역에 대해 창고 2칸에 말이 4필, 역리가 25인으로 기록돼 있었다.
첫 순시에 몸이 피곤했던 이중환은 저녁을 들고는 곧바로 잠을 청했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피곤함에도 일찍 잠을 깬 이중환은 아침을 먹고는 바로 작내역을 나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내로 장곡역을 거쳐 경남의 경계인 우두령까지 돌아보고 김천본역으로 돌아갈 셈이다.
지례현의 현청 소재지인 교리에 이르니 마을 입구에 '장지도(張志道) 윤은보(尹殷保) 서즐(徐陟+馬) 정려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신임 도찰방의 지례현 순시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지례현의 이방은 정려각을 가리키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려각으로, 고려 말 향리로 낙향해 후학을 양성한 장지도'윤은보'서즐 등 사제지간인 세 사람의 효행이 서려있다"고 설명했다.
이방이 들려주는 바에 따르면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지례현 거물리에서 태어난 장지도는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 조정에서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 조선 건국 초에 종4품의 소감(少監)직에 올랐으나 태종 조에 이르러 골육상잔의 참극을 목격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한 장지도는 향리인 거물리 바람실마을에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자들 중에서 윤은보와 서즐의 학문이 출중했는데 두 사람은 아들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어버이의 예로서 봉양을 해 훗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殷保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효의 행적이 수록됐다.
삼강행실도에는 '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이 장지도에게 배웠는데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시묘살이를 했다. 여막을 지키던 중 회오리바람이 불어 향로가 날아가자 까마귀가 향로를 물어다 주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후 스승을 어버이와 같이 섬기고 예를 다한 윤은보와 서즐에게 1432년(세종14) 정려문과 벼슬을 내렸다'라고 기록돼 있다.
지례현 관아를 들러 현감과 통성명을 나누고 지례향교를 방문하니 다락 사반루에 다과를 차리고 전교 이하 마을 유지들이 모두 나와 극진한 예로서 신임 찰방을 예우한다.
지례향교는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소실됐다가 다시 세워졌다는데 주악산 중턱에 자리해 지례현 앞을 흐르는 감천의 굽이치는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충과 열로 살다간 흔적, 박몽열부부 정려각
다시 길을 나서니 벌써 해는 중천이다. "장곡역에서 점심을 하자면 서둘러야 합니다요." 말고삐를 잡은 역졸은 마음이 급한지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대덕으로 접어들자 중산마을 박바우모티에 서 있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박몽열과 부인 문화류씨를 기리는 정려각이 이중환을 반긴다.
박몽열(朴夢說'1555~1597)은 황간현감으로 재임 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간'개령'상주에서 의병을 모아 항거하고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문화류씨 부인은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자마자 자결했고, 이 같은 사실은 뒷날 우암 송시열이 '한준고사'(韓俊古事)에서 부부의 충절과 열행을 기록한 것이 밝혀져 1882년 뒤늦게 정려가 내려졌고 다화마을 앞에 정려각이 세워졌다.
정려각 내에는 '통정대부황간현감 겸 청주진관병마절제도위 박몽열 증가선대부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자'(通政大夫黃間縣監 兼 淸州鎭管兵馬節制使 朴夢說 贈嘉善大夫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者)와 '증병조참판밀양박몽열처증정부인문화류씨지각'(贈兵曹參判密陽朴夢說妻 贈貞夫人文化柳氏之閣)이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닭을 못 키우게 된 호미마을의 풍수지리
역마에서 내려 나라를 구한 충신과 정절을 지킨 부인께 거듭 예를 표한 후 장곡역을 향하다 보니 말을 끌던 역졸이 오른쪽 마을을 가리키며 "저 마을이 닭을 한 마리도 안 키운다는 호미마을입니다요"라고 알려준다. "닭을 안 키우는 이유가 무엇이더냐?"고 묻자 역졸은 호미마을 호랑이와 닭 이야기를 풀어냈다.
"저 마을 뒷산은 예부터 풍수지리로 볼 때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와호형(臥虎形)인데 마을이 자리한 곳이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한답니다요. 그래서 범 호(虎)에 꼬리 미(尾)자를 써서 호미라 이름을 지었는데 호랑이는 밤을 상징하고 닭은 새벽을 의미해 서로 상극인지라 마을에서 닭을 키우면 호랑이 기운이 사라진다 하여 닭을 키우지 못하게 됐고, 그래서 마을 동훈(洞訓)이 호미금계(虎尾禁鷄)가 되었답니다요." "호미금계라. 신기한 일이구나."
웃어넘길 수도 있건만 선현들의 세심한 가르침을 좇아 대대로 닭을 금하는 풍속을 이어오고 있는 호미마을 주민들의 마음 씀씀이가 갸륵하기 그지없다고 이중환은 빙그레 웃는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느라 장곡역(長谷驛'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관기리)에 당도하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환영나온 역리들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점심을 급히 먹은 후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으로부터 오른편으로 길을 잡고 덕산재를 넘으면 무풍을 거쳐 무주로 이어지고 그대로 우두령을 넘으면 거창'함양을 거쳐 진주로 나아갈 수 있으니 과연 천혜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의 격전지 우두령과 감천 발원지
장곡역에서 새로운 역마로 갈아타고 우두령을 향해 길을 재촉해 10여 리를 달려가니 고개 정상에 닿았다. 우두령은 경상남북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삼국시대로부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생김새가 소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소 우(牛)자에 머리 두(頭)자를 써서 우두령이라 했다 합니다. 170리 감천(甘川)이 시작되는 발원 샘이 이 고개 위쪽 봉화산 자락에 있습니다."
따라나선 장곡역장이 우두령 이름의 유래와 함께 고개에 얽힌 지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지난 임진년의 왜란 때 고령의 김면(金沔) 장군과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전라도를 향하는 왜병 1천500명을 이 고개에서 막아 전라도를 적의 수중으로부터 지켰다고 합니다."
이중환은 국난의 위기마다 늘 호국의 성지가 됐던 우두령에서 조국을 위해 뼈를 묻은 무수한 선현을 기리는 예를 올린 후 말머리를 돌렸다.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디지털김천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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