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 하면 자연스럽게 디에고 벨라스케스나 프란시스 데 고야가 떠오른다. 피카소, 달리, 미로 등 현대미술의 수많은 거장들도 스페인 출신이다. 하지만 엘 그레코만큼 스페인과 밀착된 느낌을 주는 화가는 없을 듯하다. 이방인이지만 전 생애에 걸친 성취가 스페인의 한 도시에서 이루어진 예외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크레타 섬 출신의 엘 그레코는 16세기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이었던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했다. 그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는 본명 대신 '그리스인'이란 뜻의 별칭으로 불렸다. 유서 깊은 톨레도의 지리적 여건 탓인지 그의 비정통적인 기법은 당시 큰 인기를 누렸지만 미술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늦었다.
지금 엘 그레코는 틴토레토의 매너리즘 양식에서 영향을 받아 바로크 미술의 격정적인 표현을 예시한 독특한 화풍의 소유자로 자리매김했지만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세련된 전통을 계승한 유파들에게 인정받기 쉽지 않았을 특이한 테크닉의 소유자였다. 19세기 중반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그를 재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가장 혁신적인 작가들로 평가받는 마네와 세잔 같은 이들이었다.
마침 프라도미술관은 지난여름 '엘 그레코와 모던 페인팅'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을 개최해 그의 작품이 지닌 중요성이 어떻게 현대미술 속에 반영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특별히 선정된 25점의 작품과 거기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70점 이상의 모던 아트 페인팅을 8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비교'전시함으로써 엘 그레코 영향의 복합성과 풍부함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전시는 엘 그레코의 유명한 '수태고지' 작품과 마네의 1864년 작 '천사와 함께 있는 죽은 그리스도'의 비교로 시작했다. 마네의 검은 그림들은 명백하게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고 거기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뿐 아니라 엘 그레코도 포함돼 있다. 세잔 역시 엘 그레코에게서 근대적 요소의 모티프를 얻은 대표적인 화가이며 피카소를 위시한 큐비즘 작가들과 다수의 표현주의자들, 그리고 전후 앵포르멜과 미국 추상표현주의 폴록 같은 작가들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다.
엘 그레코의 중요한 작품들은 종교적 주제에 치중되어 있지만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보인 개성적인 표현도 현대 화가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해부학적 정확성을 벗어나 길게 늘어뜨린 인물의 형상은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풍을 더욱 과장한 것 같았으며 색채는 장식적인 사용이 두드러져 중세의 성물 공예를 연상시켰다. 붓놀림은 세련미와는 다른 방향에서 소묘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즉흥적인 듯 자유롭고 역동적이다. 원근감과 회화적 환영을 중시하는 정통 르네상스 자연주의 그림에서는 아주 이단적인 이런 특징들이 개성적인 창작으로 나아가려 한 현대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놀라운 것이었다.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관에 기대려는 반종교개혁 이후의 정신주의적 분위기와 맞물려 국제적인 교류의 변방에서 꽃핀 예술이 오늘날 현대미술에 자극이 되었던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스페인이 아니면 엘 그레코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는 전시 기획이 어려울 것이다. 가장 많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 마드리드와 톨레도의 프라도미술관, 산타크루즈미술관, 그리고 엘 그레코미술관 등이기 때문이다. 이번 특별전 기간 거리 곳곳에 초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프라도미술관에 이어 그가 머물며 활동했던 톨레도에도 온통 엘 그레코 축제 분위기 일색이었다. 특히 산타크루즈미술관은 대작 중심의 소장품으로, 엘 그레코미술관은 그의 초상화와 나란히 틴토레토 작품까지 함께 소개하는 특별전을 기획하여 방문객들을 맞았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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