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후천개벽과 무극대도를 하늘에 고하고 떨쳐 일어섰던 영해 동학혁명이 오랜 준비에도 불구하고 여세를 몰지 못하고 며칠 만에 일단락됐다. 7년 후인 1878년 음력 11월 3일 영해 동학혁명의 현장 영해부성 남문 4㎞ 외곽 남면 북평리(현재 축산면 부곡리)에서 훗날 일본군을 벌벌 떨게 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申乭石'본명 신태호'본관은 평산) 13도 창의군 교남창의대장이 태어났다.
◆'호랑이'의 허무한 최후
3년여의 항일 의병투쟁으로 동해안과 경북 북부 지역 일제를 벌벌 떨게 했던 신 장군은 추워진 날씨와 조여오는 추적을 피해 1908년 12월 11일(음력 11월 18일) 영덕군 북면 눌곡(현재 지품면 눌곡리)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영해 희암에 이어 영양에서도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다시 영해'평해'안동 등 내륙을 넘나들며 의병투쟁을 계속하다 겨울이 오자 장군은 투쟁 전력을 보충하고 다음해 봄 새로운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로 기약하며 잠시 의진을 해산 후 곳곳의 동지를 찾아다니던 차였다.
밤이 깊은 오후 9시쯤 신 장군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옛 부하였던 김상렬'상근 형제의 집을 찾았다. 반가운 얼굴로 신 장군을 맞이한 김씨 형제는 피로에 지친 신 장군에게 술과 고기를 권했다. 깊은 잠에 빠진 신 장군을 김씨 형제는 도끼로 무참히 공격했다.
맨손 무술의 달인으로 전해지는 신 장군이었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중상을 입고 김씨 형제 집을 뛰쳐나왔다. 신 장군은 아귀처럼 달려드는 김씨 형제를 피해 계곡을 따라 200~300여m를 내려오다 시리도록 환한 둥근 달 아래 눈 덮인 계곡의 널따란 암반 위에서 다음날 오전 1시쯤 31세의 나이로 피 끓는 항일의병투쟁의 종지부를 찍고 순국했다. 전국적 의병조직인 13도 창의군의 경상도 부대인 교남창의대의 대장으로 봉해지고 1년도 채 안 돼 맞이한 허탈한 죽음이었다.
사실 신 장군은 항일 의병 투쟁의 전기를 마련하고자 만주행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재편해 나가는 것이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흐름이었다.
신 장군의 스승인 육이당(六怡堂) 이중립의 아들이며 함께 동문수학했던 이병국을 몰래 찾아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자료가 이병국의 경산문집(敬山文集) 중 만신순경(挽申舜卿'순경은 신 장군의 자) 편에 아래와 같이 나와 있다.
'3년여를 싸웠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밤 그대(신돌석)가 찾아와서 나에게 "지금 적의 무리들이 현상금을 걸고 내 머리를 구하고 있는데, 총탄과 화살이 퍼붓는 마당에서도 죽지 아니하였던 내가 짐승 같은 무리에게 생명을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서쪽으로 건너가서 여러 강국에게 원통한 사실을 호소하여 응원을 얻음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뒤….'
◆고려 공신 신숭겸의 후예
알고 보면 신 장군은 고려시대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중인 신분으로 전락해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신 장군의 할아버지 아버지에 대에 와서는 이마저도 그만뒀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태어난 복디미(복더미) 마을은 반촌이 아니었으며 그가 결혼한 후 양반처럼 의관을 갖추었다가 그의 스승 이중립의 동생 이성화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여기에 신 장군이 태어난 시기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외세의 침탈이 가속화되던 시기였고, 또 그가 한창 성장하던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위정척사운동, 영남만인소운동, 갑오농민혁명과 을미사변 단발령 등이 숨 가쁘게 진행된 때였다.
신 장군은 13, 14세 나이에 스승 이중립의 서당에서 1년여간 양반가의 자제들과 공부했다. 경산문집에서 이병국은 신 장군에 대한 아버지 이중립의 인물평을 전하고 있다.
'그의 마음이 명민하고 국량이 넓고 힘이 뛰어나니 스승께서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인정하고 함께 공부하게 하였으나 아버님께서 별세함으로써….'
스승을 잃은 신 장군은 15세 내외에 뜻을 펴기 위해 전국 각지로 지사'명인들을 찾아다니며 소중한 인맥을 맺고 한편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전후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격하면서 반봉건 반일 민족의식을 다졌다.
◆19세에 첫 의병 중군장
신 장군이 의병에 처음 참여한 것은 19세였던 1896년 영해의진의 중군장으로 참여한 남천쑤(남천숲) 전투였다. 남천숲은 현재의 영덕대교 아래 오십천변으로 당시 수풀이 무성했다. 전국적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이 경주를 거쳐 이해 7월 초 영덕 방면으로 이동해오자 영해의진과 영덕의진 안동의진 등이 연합해 대규모 의진을 구성한다. 하지만 일본군과 포항'안동 방면 관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해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남천쑤 전투에서 김하락 의병장은 전투 중 중상을 입고 강물에 투신, 순국하고 말았다.
신 장군과 동지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가 다시 고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을 전후해서다. 신 장군은 암중모색 끝에 1906년 4월 6일(음력 3월 13일) 자신의 생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도로변 주점 앞에서 역사적인 거병에 성공한다. 영릉(영해와 강릉) 의병장이라 쓴 기치를 앞세우자 부친은 전답 등 가산을 처분하여 무기와 군량을 구입하는 등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200~300여 명으로 시작한 영릉의진은 최대 3천여 명까지 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향토사학자들은 그가 양반 자제들과 동문수학했고 곳곳을 다니며 많은 뜻있는 인사들과 교류한 것, 그리고 그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이 같은 거병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신 장군은 3년여의 항일투쟁 동안 관아를 습격해 무기는 확보했지만, 양반가문의 지원을 바탕으로 의병들의 옷을 짓고 음식을 조달해 일반 농민들에게 피해를 거의 입히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제는 신 장군을 비롯한 의병투쟁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군을 대규모로 증파하는 한편, 귀순법으로 의병들을 회유했다. 신 장군에게는 1908년 현상금으로 황금 1천 근과 1만 호 고을의 조세권 등 현재 가치로 수백억원 가까운 현상금이 내걸렸다.
신 장군이 을사늑약을 전후해 고향에 돌아온 후 평해(현재 울진) 월송정에 올라 남긴 우국(憂國)이라는 시는 후손들에게 구국의 의지를 전하고 있다.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登樓遊子却行路)
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하노라(可歎檀墟落木橫)
남아 스물일곱에 무엇을 이뤘나(男子二七成何事)
잠시 가을바람에 기대니 감개가 새롭구나(暫倚秋風感慨生)"
영덕 김대호 기자 dhkim@msnet.co.kr
취재협조=영덕군'신돌석 후손 신재식 씨'향토사학자 이숭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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