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남아 있나이다." 명량대첩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선조 임금에게 올린 비장한 장계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의 전개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배설 장군이 없었다면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이라는 명언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명량대첩이 있기 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대패했다. 칠천량 대패 직전 조선수군의 규모는 판옥선 120여 척과 협선 130여 척, 병력 1만5천여 명(논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600여 척의 선단과 14만여 명의 병사가 부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정유재란으로 일본이 조선을 재침략하고 부산에 대거 주둔하자 임금과 조정은 겁에 질렸다. 임진년 당시처럼 일본군이 곧장 한양으로 진격해올까 봐 하루라도 빨리 일본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라고 수군을 압박했다. 당시 조선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이 명령이 무리하다는 현장 판단에 따라 미적거렸다. 그러자 조정은 이순신을 서울로 송환해 고문하고 파직했다. 조정은 심지어 이순신을 사형시키려고까지 했다.
이순신 장군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 역시 수군 단독으로 부산포를 공격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권율이 이끄는 육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오히려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고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죽을 뻔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던 원균은 어쩔 수 없이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나아갔다. 7월 5일 한산도를 출발한 원균 함대는 옥포와 다대포를 거쳐 지친 상태로 부산포까지 이르렀다. 원거리 진격을 하는 동안 일본군은 교전을 피하며 조선수군을 지치게 했다. 7월 14일, 물을 구하기 위해 가덕도에 오른 조선수군은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400여 명이 전사하고, 전선 20여 척을 잃었다.
여기서 원균은 가까스로 군대를 빼내 피했다. 7월 15일은 풍랑이 거셌다. 원균은 함대를 칠천량으로 이동시켰다. 칠천량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바다로 파도를 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한산도까지 물러났어야 했지만 이순신이 겪었던 고초를 알았던 원균은 차마 군대를 물리지 못했다.(원균이 만약 함대를 한산도까지 퇴각시켰다면 그 역시 서울로 압송돼 고문당했을지도 모른다) 지칠 대로 지친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몰살당했다. 이날 치열한 전투현장에서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함대가 바로 배설 장군이 지휘하던 10여 척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당시 재상이었던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에서 '(배설이) 칠천도는 물이 얕고 좁아 배가 다니기 좋지 않으니 진영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다. 배설은 자기가 이끄는 배들과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여 경계를 삼엄하게 해서 변란에 대비했다'고 적고 있다. 그 배설 장군이 바로 금오산성을 수축한 주인공이다.
조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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