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천년 신라왕궁 발굴, 40년 대장정 시작된다

경주 월성 발굴조사 12일 개토제 서기 101년 축도 신라 역사 정수

천년 왕국 신라의 왕궁이 자리했던 월성(月城)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된다. 신라가 한창 융성했을 당시 월성의 모습을 디지털 이미지로 복원했다. 경북도 제공
천년 왕국 신라의 왕궁이 자리했던 월성(月城)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된다. 신라가 한창 융성했을 당시 월성의 모습을 디지털 이미지로 복원했다. 경북도 제공
현재 월성지구 모습.(항공사진)
현재 월성지구 모습.(항공사진)

신라 역사의 정수이자 한국 고대사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경주 월성(月城)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화된다. 전체 발굴기간은 적어도 40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재청'경주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은 11일 월성 발굴조사 계획을 공개했다.

◆월성은 어떤 곳인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제5대 파사왕(파사니사금) 22년(서기 101년)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고 이름 짓고, 가을 7월에는 왕이 월성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신라사람들은 달을 닮았다고 해서 월성으로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반월성(半月城)으로 불렸다.

이후 기록만 놓고 볼 때, 월성은 935년 신라 멸망에 이르는 경순왕까지 무려 835년간 신라 왕들이 대대로 거주한 왕성 역할을 했다. 천년 왕국 신라와 운명을 같이한 월성은 그래서 흔히 '천년왕성'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 때문에 월성은 한국 고대사 최대의 유적으로 꼽혀왔다.

당시의 정치'경제'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많은 물질자료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왕궁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나 연구는 없었다.

◆이전에 어떤 발굴이 있었나?

월성은 1915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 발굴조사를 했다. 당시 월성 서쪽의 남쪽 성벽을 절개지에서 골촉, 골침, 멧돼지 이빨, 사슴뿔, 동물뼈, 탄화곡물, 토기편 등을 수습했다. 이후 1979~1980년 월성 동문지를 조사해 정면 1칸, 측면 2칸 규모의 문터를 확인하고, 성벽에 대한 대략적인 토층 상황과 석축 해자 유구를 확인했다. 1984~1985년 성벽 바깥에서 해자를 발굴, 해자가 기능을 잃은 뒤 통일신라시대에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85~2014년 해자와 계림 북편 건물터, 첨성대 남편 적심(積心) 건물지 등을 확인했다.

그러나 본격 내부 발굴은 없었다. 2003~2004년 지표조사를 통해 70여 기에 이르는 초석과 연못터, 우물터가 있음을 확인했고, '在城'(재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수습했다. 2007년 내부 지하 레이더 탐사를 통해 중요 건물터가 집중돼 있음을 확인했다.

◆어떻게 발굴조사가 이뤄지나?

문화재청과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은 12일 오후 2시 현장에서 발굴조사에 착수했음을 알리는 개토제(開土祭)를 열었다. 역사적인 내부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동서 방향으로 길게 형성된 월성 전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A~D 4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이 중에서 중앙부에 위치하는 C구역에 대한 시굴조사에 착수한다.

시굴조사는 본격 발굴조사가 아니라 유적 분포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다. 시굴조사 구덩이(트렌치)는 길이 20m, 너비 4m 규모이며, 동서 방향으로 11열, 남북 방향으로 9열을 약 20m 간격으로 넣는다. 이달 15일부터 공식 착수하고, 내년 12월 31일까지 시행한다. 장마 기간 등을 제외한 조사일수는 230일, 조사 면적은 5만7천㎡(약 1만7천240평)이다.

C구역을 첫 사업 대상지로 선택한 까닭은 지중탐사 결과 이곳에 왕궁 중심 건물로 생각되는 대형 건물 기초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이런 기초조사 결과를 토대로 본격 발굴과 정보복원 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다. 월성 발굴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다. 문화유산계에서는 적어도 40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경주 이채수 기자 c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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