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상 960회가 넘는 침략을 받았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 다른 나라를 거의 침략하지 않았다!" 국사 시간에 귀가 닳도록 들은 이야기다. 숫자가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뜻은 분명하다. 반도라는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서로 충돌했고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잦은 침략을 받았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지정학은 우리에게 아직도 이처럼 저주의 대상인가? 아니면 축복인가?
내년은 을미년 양띠의 해다. 120년 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된 지 120년, 광복 70년, 한일 수교 50년이 된다.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변함이 없으나 그동안 우리는 이런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기 위해 쉼없이 노력해 왔다. 그리고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역량은 크게 신장되었다. 역사상 우리가 중국보다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중국 및 미국이라는 강대국으로부터 '구애'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이처럼 좋은 기회를 어떻게 잘 활용하여 우리의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지난달 10일부터 베이징에서 이틀간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가졌다. 동중국해에서의 영토분쟁과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관으로 갈등이 치솟던 때에 가진 회담이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국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아직까지 일본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다. 오는 14일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가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 확실하기에 그는 앞으로 큰 이변이 없는 한 4년간 더 총리직을 수행한다.
얽히고설킨 일본과의 매듭을 푸는 묘안을 짜야 한다. 날로 자신감이 커지는 아베 총리는 '역사전쟁'을 지속할 것이기에 우리는 중국과의 제휴 등 이 문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가 우리와 일본과의 협력을 계속해서 저해해서는 우리에게 득이 될 리가 없다. 역사는 단호하게 대처하되 중국의 부상에 대한 대응책, 기후변화 및 해양 오염의 공동대처 등 양국에 도움이 되는 협력 사업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내년 을미년에 특히 더 중요하다. 일본과의 국교를 수립한 50년이 되는 해이고 그 당사자가 고 박정희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지정학을 축복으로 바꾼 대표적인 나라가 베네룩스 3국이다. 3개국 모두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국이다. 특히 벨기에는 19세기부터 영세 중립국이었지만 1,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로 돌진하는 독일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2차대전 후 3국은 1948년에 관세동맹을 체결하여 유럽통합의 전범을 제시했다. 이후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유럽연합의 주요 기구가 있는 '유럽'의 도시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평화의 도시로 유명하며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 등 국제기구가 있다. 인구 50여 만 명의 룩셈부르크도 금융서비스 산업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이 7만 7천900달러(2013년 말)로 부국이다. 이들 3국은 힘을 합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동 이익을 추구한 전략으로 지정학을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명박정부 때부터 추진해온 중견국 외교 전략은 현 정부에서도 계승되어 우리의 주요 외교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근혜정부에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경제력이나 군사력 등 국력은 강대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의 공동문제에 대해 외교력을 발휘하여 해결을 중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게 중견국이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우리는 개발 의제를 제시했고 이 의제는 아직도 G20 차원에서 계속하여 추진 중이다. 반세기 만에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탈바꿈한 우리가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을 적절하게 조율하여 얻어낸 성과다.
국민 개개인의 역량과 이를 결집할 수 있는 각 분야의 리더십이 결합되어야 우리의 총 역량은 몇 배의 힘을 낼 수 있다. 이래야 우리는 지정학적 저주에서 벗어나 이를 현명하게 활용하여 축복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런 역량 강화에 힘을 결집할 수 있는 을미년이 되기를 기대한다.
안병억/대구대 교수·국제관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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