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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아픔을 나누는 기부, 생명을 나누는 기부

재작년 5월 고 김수환 추기경 추모 사진전이 열린 칠곡군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과 석전성당에서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실시한 사랑의 장기기증 캠페인에 100여 명이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매일신문 DB
재작년 5월 고 김수환 추기경 추모 사진전이 열린 칠곡군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과 석전성당에서 (재)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실시한 사랑의 장기기증 캠페인에 100여 명이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매일신문 DB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서 모발 기증자들을 위해 만든 감사장. 김보름(가명) 씨 제공.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서 모발 기증자들을 위해 만든 감사장. 김보름(가명) 씨 제공.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아프다.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그것을 혼자 힘으로 헤쳐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기부자들이 있다. 염색과 파마를 하지 않고 몇 년간 머리카락을 길러 백혈병 아동들에게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혈모세포를 기증해 생명을 살리고, 사후 기증에 미리 서약해 나눔을 실천하는 등 따뜻한 기부의 씨앗이 곳곳에 퍼져 있다.

◆소아암 환자 위해 머리카락도 기부해요!

김보름(가명'30) 씨는 얼마 전 길었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랐다. 기분을 전환하려고 머리 스타일을 바꾼 게 아니었다. 25㎝ 길이로 자른 머리카락을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이하 소아암협회, http://www.soaam.or.kr)에 기증하기 위해서였다. 소아암협회는 항암 치료로 머리카락을 잃은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가발을 만드는 '모발 기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 머리카락이나 다 기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염색과 파마, 매직을 하지 않은 25㎝ 이상의 자연 모발만 기증할 수 있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3년째 이어온 일이다.

김 씨는 TV를 보다가 우연히 모발 기부를 알게 됐다. 스쳐 지나가는 방송 프로그램에 눈길이 간 것은 백혈병을 앓으며 삭발을 했던 친구 생각이 나서였다. 마침 그때 머리카락이 길었던 터라 조금 더 길러서 자른 뒤 소아암협회로 보냈다. "생각해 보니 주변에 백혈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어요. 어렸을 때 동네에 백혈병을 앓던 아이도 있었는데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처음 모발 기증을 했을 땐 이 아이가 떠올랐어요."

염색, 파마를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기르는 데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모발 기부를 결심하고 나서도 굳게 먹은 마음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김 씨는 "직장생활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 걸로 기분 전환하면 좋은데 그게 안돼서 갈팡질팡한 적도 있다"며 "하지만 지금껏 기른 게 아까워서 다시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모발 기부는 일단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두기 아까운 묘한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이름을 밝히는 것이 부끄럽다는 김 씨. 그가 생각하는 기부란 뭘까. "꼭 머리카락을 기부하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가진 것,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면 되니까요. 염색, 파마하지 않고 머리카락 기르는 것을 세 번은 못할 것 같아요. 이번엔 파마하려고요. 야무지게 돈 벌어서 모발 말고 현금 기부해야죠!"

김 씨처럼 소아암협회에 머리카락을 보내는 사람은 매년 4, 5천 명에 달한다.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기획사업국 송원규 대리는 "부모님이나 학교 권유로 청소년 여학생들이 가장 많이 기부한다"며 "일반 직장인, 미용실에서 일하시는 분들 등 다양한 분들이 모발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발을 만드는 과정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가발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30, 40명이 기증한 모발이 들어가며, 가발전문업체에 의뢰해 '맞춤형' 가발을 무료로 제작해 소아암 환자에게 전달한다. 송 대리는 "아이들이 원하는 가발 스타일, 길이가 다 달라서 환자 본인, 가족, 업체와 협의해 가발을 만든다"며 "간혹 염색과 파마를 한 머리카락을 보내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모발은 가발을 만들 때 약품과 열처리를 하면 다 녹아버리기 때문에 꼭 자연 상태의 모발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모발 기부하는 법

-25㎝ 이상 길이의 약품 처리(파마, 염색 등)를 하지 않은 자연 모발을 끝 부분을 묶은 뒤 잘라서 비닐 포장해 우편으로 발송.

-발송 비용은 선불로 본인 부담이며 보낼 때 반드시 이름과 휴대전화번호, 주소를 적어야 한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7길 37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모발 기부 담당자 앞

◆조혈모세포, 사후 장기기증으로 새 생명 살린다

장기기증은 세상을 떠나며 새로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지난달 대구에서는 불법 체류 중이던 외국인 근로자의 장기기증으로 4명이 새 생명을 얻었다.(본지 11월 21일 자 1면 보도) 경북의 전자부품업체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태국인 고(故) 사라윳(31) 씨는 평소에 장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었고, 한국에 있는 동생이 태국의 연락을 취한 뒤 대사관 및 한국장기기증원(KODA)을 통해 의사를 밝혔다. 사라윳 씨의 신장과 간은 어린이 말기신부전 환자와 간경변증 환자 등 4명에게 이식됐다.

장기기증 희망 등록은 본인이 뇌사 상태에 빠지거나 사망했을 때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표시하는 것이다. 2009년 2월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기증 이후 장기기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바뀌면서 장기기증 희망자도 증가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5만9천999명이 장기기증 희망자로 새로 등록했으며 이는 전년도 8만7천754명에 비해 82% 증가한 수치다. 2013년 12월 기준으로 장기기증 희망자 누계는 105만3천196명에 달한다.

장기기증 희망 등록 절차도 간편해졌다. PC나 스마트폰으로 질병관리본부 장기이식관리센터(www.konos.go.kr)에 접속해 '기증 희망 등록' 코너에서 공인인증서로 본인 인증을 한 뒤 신청하면 된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신청했다가 언제든지 (장기기증 희망) 철회도 가능하다. 만약 자신이 사후 기증에 동의했다고 해도 뇌사나 사망 시점에 가족들이 모두 반대하면 장기를 기증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백혈병이나 암환자에게 조혈모세포도 기증할 수 있다. 조혈모세포란 보통 사람의 혈액 중 약 1% 정도에 해당하고 모든 혈액 세포를 만드는 어머니 세포를 말한다. 골수나 말초혈 조혈모세포는 기증을 한 뒤 2, 3주 안에 기증 전 상태로 돌아가며, 기증자의 혈액 세포 생성 능력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현재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 대한적십자사, 생명나눔실천본부, 한마음한몸운동본부 등 5개 기관이 조혈모세포를 모집하고 있으며, 만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등록할 수 있다.

조혈모세포 기증자가 직장인이라면 신체검사나 입원 때문에 자리를 비워도 관련 법에 의해 유급 휴가를 받을 수 있다. 사후 장기기증과 달리 조혈모세포 기증은 확실한 기증 의사가 있을 때 등록해야 한다. 대한적십자사 혈액수혈연구원 특수혈액관리팀 이미정 팀장은 "백혈병 환자가 조혈모세포 일치자가 나타나서 기뻐하고 있는데 가족의 반대 등으로 기증자가 마음을 바꿔 수술이 취소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조혈모세포가 일치하는 다른 기증자를 찾지 못하면 그 환자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며 "주변 사람들과 충분히 협의한 뒤 확실히 기증할 수 있을 때 등록해야 환자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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