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할매·할배의 날을 아십니까

"할아버지가 밖에 나갔을 때 날이 저물면 슬퍼하고 밤에 졸려도 자지 않고 안타까워하며, 늦게 돌아온다고 원망한다. 이것이 진정 더불어 사는 것, 한뿌리 한가지에서 나온 까닭이다."

조선시대 묵재 이문건 선생이 손자인 숙길을 기르면서 쓴 육아일기 '양아록'의 일부다. 양아록에는 이처럼 손자를 기르면서 느낀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구구절절 기록돼 있다.

굳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산업화시대 이전만 해도 3, 4대가 한집에 살았고 손자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애지중지 보살핌을 받으며 양육됐다. 아이들은 하나의 작은 도서관보다 더 꽉 찬 조부모들의 지혜와 경험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하나하나 배우며 반듯하게 자랐다.

그러나 급속한 핵가족화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자 손녀들을 할매'할배들의 품에서 앗아갔다. 세대는 단절되고 밥상머리에서부터 이뤄졌던 인성교육도 빛을 잃었다. 사회적으로 갖가지 병리 현상이 나타나고 나라는 갈등과 혼란을 빚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공동체 정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기본은 바로 가정이다. '할매'할배의 날'은 단순한 노인정책의 하나가 아니다. 조손 간 격대문화 회복을 통해 잃어버린 정신적 뿌리를 되찾고 가족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함이다. 이는 혼과 정체성을 정립하는 일과도 직결된다. 어른을 제대로 모실 때 사회가 건강해지고 그렇게 되면 나라의 기강도 자연스럽게 바로 서기 마련이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조부모의 날을 국경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조부모의 날이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를 학교로 초청해 꽃을 달아드리고 후손들에게 조부모의 지식과 인생경험을 배우게 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14개 나라가 조부모의 날을 지정해 놓고 있다. 자녀들의 인성교육, 화목한 가족관계 형성에 조부모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장차 한국 문화가 인류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효 사상일 것"이라고 갈파했다. 효뿐만 아니다. 세계적 석학들이 퇴계를 연구하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새마을운동을 전수받으러 경북을 찾아온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를 배우려 하는데 막상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고 산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하였던 자연친화적인 생활, 윤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가치관,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과 같은 미덕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라는 생각이든다.

경북은 한국정신문화의 창(窓)이다. 국난극복의 중심이 되었다. 끊어진 역사의 맥을 잇는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렇다면 나라의 정신적 중심인 경북이 먼저 나서야 한다. '할매'할배의 날'도 그래서 시작했다. 각계각층의 여론을 수렴하고 관계 전문가 회의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도의회에서 조례도 제정했다.

이제 새로운 격대문화의 첫 걸음은 내디뎠다. 한 달에 단 하루지만 사랑과 감사, 가족의 정을 돈독히 하는 특별한 날이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세대 간 소통이 회복되고 아이들이 조부모의 삶의 지혜를 배우는 교육의 장으로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정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꾸준히 펼쳐 나갈 것이다. 학교교육, 사회교육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부모들의 역할이 크다. 부모가 조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아이는 커서도 부모를 공경하기 마련이다. 도청 공무원부터 자녀와 함께 조부모 찾아뵙기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아이 손잡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자. 손자 손녀가 팔짝팔짝 뛰면서 달려가고 대문 앞까지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이하는 할매'할배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이것이 '사람중심 경북세상'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김관용 경상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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