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북부와 동해안을 무대로 항일의병투쟁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이 1908년 겨울 허무하게 스러졌다. 강력한 항일운동의 중심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 장군이 숨진 이듬해엔 안중근 의사가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하며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책동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이에 놀란 일제는 침략을 본격화하며 1910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만다. 하지만 신 장군 사후 10여 년 만에 영해에서는 한강 이남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나 면면히 이어오던 항일구국정신을 다시 한 번 드러낸다.
◆만세운동 후손의 뜨거운 눈물
영덕군 영덕면(현재 영덕읍) 화개리에 살던 서른 살의 임순근은 1919년 3월 18일과 19일 영해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만세운동과 전국 각지의 만세운동에 대해 소식을 들었다. 수천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일본 헌병과 일본군의 총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숨졌다는 것이었다. 당시 경북 북부권과 동해안 최대 시장이었던 영해 장날에 벌어진 이 사건은 임순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장날에 갔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 소식을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임순근은 3월 20일 지품면 신안동에 사는 윤석훈의 집에서 이러한 소식에 함께 나누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은다. 이들은 그날 저녁 태극기를 만들고 여기에 임순근이 '대한조선독립만세'(大韓朝鮮獨立萬歲)라고 썼다.
그리고 이러한 만세운동의 뜻을 동네 선후배들에게 알렸다. 공교롭게도 지품면은 신돌석 장군이 배신한 부하들의 손에 숨진 곳이기도 해 이곳 사람들은 신 장군의 기개와 전공, 그리고 최후를 이야기하며 존경과 안타까움을 함께 표현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만세운동이 작은 규모지만 벌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윤석훈의 집 앞에 모인 6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하지만 영해만세운동 이후 일본 순사들이 곳곳에서 감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터였다. 이내 이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임순근은 그해 5월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대에 처해졌다.
90대의 태형으로 엉덩이는 피로 흥건했으며 엉덩이뼈에도 큰 탈이 났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임순근은 오랫동안 누워 있다 일어났지만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니었다.
일경의 감시 또한 심해졌으며 일제 앞잡이들의 괴롭힘 또한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임순근은 그 후 고향을 등지고 외지로 나가 10여 년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늦장가를 든 지 얼마 안 돼 임순근은 해방을 4년 앞둔 1941년 52세의 나이로 숨졌다.
임순근이 숨질 때 3세였던 그의 아들 임만진(79) 전 영덕군 광복회 회장은 이 같은 선친의 만세운동과 태형에 따른 고통 등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19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주변의 도움으로 알게 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임 전 회장의 아버지 임순근은 1999년에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임 전 회장은 아버지의 숭고한 뜻을 잇기 위해 사재를 털어 독립유공자 발굴과 등록에 10여 년째 동분서주하고 있다.
◆민중들 48년 만에 다시 봉기
기미년 만세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3'18 영해만세시위이다. 3천여 명 이상의 참가 규모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획돼 있었고, 지방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과 유림이 종교적 차이를 뛰어넘어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한데 뭉쳤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영해 만세시위가 시작된 것은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김세영이 경성에서 거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발길을 돌려 영덕으로 돌아오면서부터이다. 지품면 낙평동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격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영덕에서도 이러한 애국애족 만세시위를 결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포기했던 것이다.
3월 12일 영덕으로 돌아온 그는 구세군 관계자 권태원을 만나 이러한 뜻을 논의하고 영해와 영덕 지품면 등에 사람을 보내 세를 규합한다. 이어 영해면 괴시동의 5대 성씨 유림들과도 접촉해 기독교'천도교'불교'유림 등이 힘을 합쳐 떨쳐 일어선 경성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뜻을 모은다. 4일 만에 기독교인들과 유림들은 거사일을 18일로 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정하고 태극기를 준비했다.
3월 18일 정오 정규하'남효직'남세혁'박희락 등이 태극기를 안고 영해시장에 들어갔다. 뜻을 함께한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눈 이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눴다. 오후 1시쯤 영해주재소 앞에서 만세의 첫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의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면서 자연스럽게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쳤다. 삽시간에 3천여 명의 주민들이 시위군중으로 뭉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은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놀랐고, 엄청난 호응과 규모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만세시위군중은 시장길을 따라 행진해 영해공립보통학교로 몰려갔다. 훈도와 학생들에게도 독립의거에 동참할 것을 알리고 다시 주재소로 돌아왔다.
이때 영해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 스즈키가 평화로운 시위에 기름을 붓는다.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하고 이어 대형 태극기를 뺏으려 달려들었다. 흥분한 만세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이닥쳐 집기를 부수고 순사들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았다.
스즈키 순사부장은 군중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그의 제복은 누더기가 돼 버렸다. 겁을 잔뜩 먹은 다른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는 무기를 버리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군중들은 우편소와 면사무소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또한 주재소의 무기를 모두 탈취해 파기해버렸다.
소식을 접한 영덕경찰서에서 일경이 달려와 다시 군중의 해산을 시도하지만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제압하고 무기를 뺏고 감금했다. 이날 밤 시위 군중들은 밤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영해를 누비면서 시위를 벌였다. 일본에 대한 울분이 이날 시위를 통해 한꺼번에 표출되면서 영해는 그날 흥분과 해방감의 도가니였다. 수탈과 압제에 항거해 민중이 한뜻으로 뭉쳤던 1871년 영해동학혁명의 그날처럼….
3월 19일에도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일제는 이젠 군대까지 동원했다. 일본군의 발포로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영덕군에서는 영해면을 비롯해 영덕면 지품면 병곡면 창수면 남정면 등에서도 만세시위가 잇따랐다. 만세시위로 당시 영덕군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은 총 196명이었다.
취재협조=영덕군'벽산 숭모회 박동수, 최상발'임순근 후손 임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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