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세종대왕, 사마르칸트

아득한 서역 땅 우즈베키스탄의 깊은 오지에 사마르칸트라는 고도(古都)가 있다. 이곳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한 후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 역할을 해왔고, 우리와도 7세기 이래 교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아프로시압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구려 사신 벽화가 그것이다.

이 도시는 1220년 몽골의 침략으로 패망한 적이 있지만,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에 의해 이슬람 도시로서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다. 건국 왕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기점으로 바그다드(이라크), 다마스쿠스(시리아), 이스파한(이란), 델리(인도), 앙카라(터키), 그리고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융성기에 내로라 하는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모여들어 지식인층을 형성하면서 사마르칸트는 중세 중앙아시아 지성의 산실이 되었다. 세종대왕(1397~1450)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는 어쩌면 티무르 제국의 대표적 지성 울루그베그(1394~1449)왕의 도펠갱어일지도 모른다.

울루그베그는 티무르의 손자로 제국의 네 번째 왕이었다. 세종은 태조 이성계의 손자로 조선의 네 번째 왕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할아버지가 전설적인 무인 출신의 군주였고, 티무르가 전투 도중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였던 것처럼 이성계도 다리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다. 문무를 겸비한 울루그베그의 부왕 샤 로흐는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내란을 평정해야 했고, 세종의 부왕 태종도 무예와 학문이 모두 뛰어났지만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겪어야 했다. 울루그베그와 세종은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빼고는 나고 죽은 날마저도 비슷했던 동시대 인물이었다.

울루그베그는 스물여섯 살 때인 1420년에 메드레세를 세우고 그 입구에 '학예를 연마하는 것은 모든 국민의 의무'라고 새겨 학문을 장려했다. 그때 이미 1백 여 명의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했다고 하니, 메드레세는 당대 중앙아시아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것과 같은 해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수학, 철학, 천문학을 강의하던 울루그베그는 한글창제를 위해 노심초사하던 세종의 모습 그대로이다.

울루그베그는 천문학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대규모 원형 천문대를 세우고 992개의 별자리를 밝힌 천문도를 발간하기도 했다. 더구나 1년이 365일 6시간 10분 8초라고 계산한 것은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비교해도 오차가 1분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그가 개척한 당시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세종은 이때 혼천의(渾天儀)를 비롯한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고, 이슬람 천문학에 기초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펴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을 정비했다. 그리고 이슬람 지도자들을 궁궐에 초청하여 조례를 열고, 그들은 쿠란을 낭송하며 예를 갖추는 회회송축(回回頌祝)을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우즈베키스탄 사회과학원 산하의 동방학연구소는 엄청난 분량의 필사본 자료들(Collection of Al-Biruni)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중세 중앙아시아,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중국의 교류관계는 물론이고 당대의 지리학과 수학, 천문학, 철학, 의학, 그리고 문학까지 포함하고 있으니, 실크로드학계에서는 대박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미 학계에 더 이상 쉽게 먹잇감을 내놓지 않았다. 르네상스가 동양의 문명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 문명을 폄하하고 왜곡해 온 서양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닫혀있던 이 거대한 서고를 열고 이제 '계명대학교 실크로드중앙아시아연구원'에 공동연구를 제안해왔다. 어쩌면 울루그베그 후손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세종대왕의 기억이 꿈틀거린 덕택이 아닌지 모르겠다. '인류의 문명'을 함께 개척해 온 문화 영웅을 향한 기억 말이다.

김중순/계명대 교수·한국문화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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