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겨울 포도나무

▲김여하
▲김여하

세밑이다. 친구와 나는 향촌동에서 고갈비를 안주로 밤새워 막걸리를 고래가 물 마시듯 마셨다. 술 하고 무슨 원수를 진 듯 들이켰다. 아직 상권이 동성로로 건너오기 전이라 향촌동은 밤새도록 불야성이다.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우리 둘은 술김에 성당에 들어갔다. 평생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성당 첨탑 위에는 커다란 별이 반짝였고 그 아래는 수많은 꼬마전구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성당은 새벽미사를 보러오는 신자들로 붐볐다. 우리는 맨 뒷좌석에 불청객으로 앉았다. 아직 술이 덜 깨어 작취미성인데 신부님의 강론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날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는데 농부가 포도나무를 전지하고 있었다. 탐스럽고 굵은 가지가 싹둑싹둑 사정없이 잘리고 있었다.

나그네가 이를 보고 농부에게 물었다.

"그 가지를 그냥 두면 내년에 많은 열매를 맺을 텐데 왜 자르나요?"

"물론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머물러야 포도가 열릴 것이지만 썩은 가지는 불태워버려야만 새 가지가 돋고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여러분은 혹시 잘라져 불에 던져질 가지가 아닌지요?"

하더니 내년부터는 하루도 빠지지 말고 새벽미사에 나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내년부터 새벽미사에 참석할 사람은 일어서라고 했다. 처음엔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서더니 모두 일어나고 친구와 나, 둘만이 오도카니 앉아있게 되었다. 도저히 지킬 자신이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짓고 싶은 죄는 많이 남았으며, 리포트도 내야 하고 밤새워 술도 마셔야 했다.

신부님의 질책이 쏟아졌다.

"거기 제일 뒷좌석의 두 분, 왜 안 일어나는 거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쏟아졌다.

우리들은 얼굴이 벌게져서 대답했다.

"저희들은, 저희들은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를 주시하던 모든 눈길들이 실소했다. 과연 친구와 나는 잘라져 나가야 할 포도나무가지인가. 밀밭의 가라지인가.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다. 친구가 거제도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한동안 소원했다. 오랜만에 만나보니 친구네 가족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집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썩은 가지를 지니고 있는가. 버려야 할 것을 제때에 못 버려서 칼이 되고 채찍이 되어 우리를 찢고 때리는가.

헌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 둘 버리고 내려놓아서 더욱 가벼워질 일이다. 그래서 훨훨 날아볼 일이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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