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저녁 눈

저녁 눈

박용래(1925~1980)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빈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빈다.

-『박용래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시가 산문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짧다는 것이다. 4행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지만 문장에 나타난 의미보다 많은 의미가 여백에 담겨 있다. 참으로 시적이다. 그러기에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시로 우리 곁에 오래 남아 있다.

동일한 어구와 동일한 문장구조가 반복됨으로써 시의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시는 일정한 정형률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내면의 운율을 가진다. 눈 내리는 광경을 관조의 눈길로 바라보는 화자의 태도와 시의 운율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저녁 때 내리는 눈은 말집 호롱불 밑, 조랑말 말발굽 아래,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에서 붐빈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에 있었던, 지금은 사라진 우리 고유의 풍물들이다. 이 풍물들과 눈과의 만남은 다정하고 쓸쓸한 풍경을 연출한다. 겉으로 드러난 시적 의미는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행간과 여백의 시적 의미는 다양하고 풍성하다. 독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생성하리라. 특히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내리는 눈은 소외된 것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인의 오마주다.

권서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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